6. 가나안과 사사시대 그리스도
6. 가나안과 사사시대 그리스도
(1) 여호수아와 갈렙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열두 정탐꾼에 대한 이야기가 민수기 13장에서 펼쳐진다. 바란 광야에 진을 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직전, 가데스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게 했다.
13장은 그들을 파견하는 과정과
그들이 귀환 후 보고하는 부분에 관한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신명기 1장 22절을 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명기 1장 22절에서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요청이었다. 그들의
요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어 정탐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승인을 얻게 된 모세는 지파별로 사람을 파견했다. 관련하여
정탐꾼으로 선정된 열두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삼무아, 사밧, 갈렙, 이갈, 호세아
곧 여호수아요, 발디, 갓디엘, 갓디, 암미엘, 스둘, 나비, 그우엘 이었다.
선출된 정탐꾼들을 향해 모세는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 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모세는 열두명의 정탐꾼들에게 그 땅 주민들이
지닌 군사력을 파악할 것을 명령했다. 아울러 땅의 비옥함을 잘 관찰한 후 증거물로 과일들을 가져올 것을
또한 명령했다. 그에 따라 정탐꾼들은 사십 일 동안 면밀하게 조사를 하게 되고, 이후 귀환하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회중에게 과일들을 보여주며 정탐 보고를 하게 된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정탐 결과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토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었고, 거대한 족속도 살고 있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정탐꾼들의 보고를 접하게 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탐꾼 중에 하나였던 갈렙이 나서 그 땅을 점령 할 수 있다며 그들을 진정시키며 격려하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갈렙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정탐꾼들은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며 그것도 모자라 그 땅이 사람들을 삼키는 땅, 곧 그 땅을 얻고 지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담보가 되어야 한다는 악평까지 덧붙였다. 가나안 땅 원주민들을 묘사하기
위해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자손까지 운운했다. 자신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공동체 지체들을 가리켜 메뚜기같다며
비하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며 인도해 오시는 하나님,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생명을 철저하게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이 감겨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된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데, 교회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열정탐꾼들과
같이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는『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하셨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이다.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와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와의 차이는
율법주의를 버리고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주의 명령은 은혜와 연결된다. 회개하고 은혜가운데 있는
자는 주의 명령을 순종하게 된다. 예수님은『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고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가나안 땅에서의 아낙자손은 자로 자기라는 옛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은 또『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주라고 믿는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가장 중심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말을 하면서도 일상을 통해서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산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부르심을 입은 자는 육의 눈에 반응하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는 영의 눈에 반응한다. 부르심을 입은 자와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양과 염소로 갈라진다.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미련한 다섯처녀로 갈라지는 것이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보는 것을 통해서는 믿음이 나오지 않는다. 보는
것은 『아낙자손을 보는 순간 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육의 눈으로 반응하는 자는 반드시
넘어지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으며, 열정탐꾼이 그러했다. 눈으로 본 것 때문에,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으로 판단하고 경험한 것은 주님이 하신 약속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주님은『너희가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니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의
눈인지, 영의 눈인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라 흰옷을 사서 입으라 안약을 사서 발라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은 다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는 육에 반응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영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민수기 14장 11절에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말씀하셨다.『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한 열정탐꾼을 믿은 사람들은 얼마 전에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신 자들이다. 또한 홍해바다를 건넌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14장 30절에서『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부르심을 입고 교회로 왔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이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신도는
부활이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부활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택하심을
입은 자가 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된다.
신명기
29장 1절에서『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시내산에서의 언약과 모압 땅에서의 언약의 말씀을 말하고 있다.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출애굽한 사람들에 해당하지만, 언약의 말씀은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29장 12절에서『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여기서『언약에
참여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건너간다』는 뜻이다. 영어성경에도『enter』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히브리』
라는 말이『건넌 자』라는 뜻이다.
신명기 29장 13절에서『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은 약속이지만(깨어진 두 돌판), 모압 땅에서 세운 언약의 말씀은 맹세라는 것이다.(새로 만든 마음에 새기는 두 돌판) 신명기 29장 14-15절에서『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말씀이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주신 것은 언약이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에게는 맹세라는 말이다. 가나안, 즉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을
가진 자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에 해당한다.
신명기 29장 19절에서『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여기서『저주』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맹세』와
같은 단어(알라)다. kjv는 curse(저주),
niv는 oath(맹세)로 번역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 믿지 않으므로 저주가 되신 것이다. 그러나
새사람에게는 맹세가 되신다.
오늘날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맹세하시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약속을 주셨어도 믿지 않으므로, 저주의 말씀이 되신다.
구원은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올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자가 된다. 다시
사는 자가 신명기의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과 같은 의미다. 회개의 열매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새사람으로 부활생명으로 태어남을 믿는 자이다.
예레미야 31장 1절에서『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새 언약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고 31장 32-33절에서『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언약은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다.『내 언약을 깨뜨린 것』은 가나안 땅 앞에서 열정탐꾼의 말을 듣고 모두가 그 말을 믿으므로 언약을 깨뜨렸다.『그 날 이후』라는 말은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신약에서는 오순절을
말한다. 이 말씀은 로마서 1-10장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부르심을 입은 자와 택하심을 입은 자의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은 약 2백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믿는 자가 없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헬라어로 예수이며, 갈렙은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이방인이 먼저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 가나안의 정복 전쟁
(서문)
가나안의 정복전쟁은 신약성경으로 보면,
새사람과 옛사람의 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다. 신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하하늘부터 새사람으로 태어난다. 영적으로 보면, 신도의 옛사람은 죽었으며, 새사람으로 태어났으므로 신도의 정체성은
새사람인 것이다.
옛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이제 옛사람은 신도와 상관없는 오히려 죽어야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옛사람은 새사람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동일 선상에 놓는 자들, 예를 들어 십자가에서 죽었던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고 믿는 자들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도들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구분없이 생각만으로
옛사람은 죽었고, 새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했으므로, 옛사람을
막연하게 예수믿기 전의 마음의 상태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 마음이 변하여 새사람으로 성화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신도들은 자기와의 싸움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옛사람의 죽음은 정체성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신도 자신의 정체성은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인 것이다. 옛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받았으나, 새사람은 하나님의 시민권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5-6절에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사람 속에는 죄의 몸이 도사리고 있다. 이 죄의 몸(사륵스)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인 것이다. 이 사륵스를 일곱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성도의 영적 전쟁의 대상은 사탄과 마귀가 아니라, 바로 육체 내에서
영적인 마음을 괴롭히는 옛사람의 사륵스인 것이다. 이 일곱가지의 모습이 가나안의 전쟁 대상으로 표현된
것이다.
영적 전쟁은 내가 나를 부인하는 모습이다. 내 육체 속에 옛사람의 사륵스가
존재하므로, 새사람인 영적인 마음이 육적인 마음과 싸우는 것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영적 성숙고에 따라 싸움의 정도는
달라진다. 스스로 이길 힘이 부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견고한 진과 같이 굳게 서 있다고 성경은 표현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도하시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기를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내 자신 안에서 영적인 힘을 내기 위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가. 여리고성 전투
현대 역사가들은 여리고성 정복은 허구라고
이야기 한다. 여리고성의 고대역사에 대한 지식은 영국의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의 연구에 근거한다. 케년은 동료였던
모르티머 휠러(Mortmer Wheeler)와 함께 유적지 발굴에 동참했다고 한다. 케년이 발견한 것은 여리고성이 아주 옛날에는 중요한 도시였으나 후기 청동기시대(주전 약1200년)가 되면
촌락정도로 규모가 축소되는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가나안 정복 당시 여리고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이 행해지던 시점에 여리고는 사람이 살지않는
버려진 마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성벽이
무너지고, 모든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6:20-21)라고 하고 있다. 아마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여리고가
멸망하기 전의 모습이 아니라, 여리고성이 무너진 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파괴된 것이 사실상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이야기 일 것이다.
여리고성은 “매일 성을 한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는데, 6일 간을 그렇게 하고, 7일째는 성을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은 뿔나팔을 길게 불며, 그 소리를 들으면 백성들은 크게 외치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하니 성벽이 아래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성으로 들어가서 기생 라합과
그 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였다.
아마도 정탐꾼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보를 수집하기에는 기생 집이 가장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기생집은 정부 관리나 귀족들이 드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정탐꾼 동향이 여리고 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리고 왕이 정탐꾼을 잡기 위해 기생
집을 수색하게 되었지만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들키는 날에는 목숨이 날라 가는 판인데, 목숨을 걸 만큼 그 무엇이
있었는가, 궁금해진다. 기생은 최악의 직업인게 틀림없다. 살아가는 희망도 없고, 술과 웃음을 팔아야하는 신세를 기생과 가족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생들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요르단에서 미디안
족속들을 무찌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을 공격할 것으로도 생각했을
것이다.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정탐꾼 두명이 정보를 수집한 것의 목적을 알아차린 것이다. 정탐꾼을 여리고 왕에게 고발할 것인가, 숨겨서 나중의 안위를 얻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목숨을 거는 기로였다.
성경의 이 내용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목숨, 아니 생명과 인생 모두를 거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믿을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선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생 라합에게서 볼 때 선택의 여건이 너무나 좋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생은 최악의 직업이다. 죽어서라도 이 직업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정탐꾼을 선택하고 강력한 조건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증표를 내라”라고 한다.
정탐꾼은 그들을 달아 내린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놓도록 하고, 가족들은 집에 있도록 했다. 이
내용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바로에게 10가지의 재앙을 내리는 것 중에서 10번째 재앙으로서 장자의 죽음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피를 바르도록 하여 장자의 죽음을 피해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붉은
줄은 이같이 문설주의 피와 같은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나. 아이성 전투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점령하기 위해
다시 정탐꾼을 보낸다. 그런데 아이성을 보고 온 정탐꾼은 아이성을 대수롭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엄청난 여리고성과 비교한 것이다. 정탐꾼은 2000-3000명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보고를 하였다. 그런데 정탐꾼의
말대로 했다가 이스라엘 군의 36명이 전사하고 쫒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여호수아는 괴로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하나님께서 현현하시어 여호수아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아간이라는 자가 여리고 전투에서 모조리 죽이고 없애라고 하셨는데, 노략한 물건 중에서 외투 1벌, 금과
은 덩어리 하나씩을 슬쩍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제비뽑기를 통해서 아간이라는 자를 가려내어 아간의 외투와
금․은덩어리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 나귀, 양들과 모든 재산을 아골이라는 골짜기로 끌고 가서 돌로 치고
불살라버렸다. 참으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자식들은 무슨 잘못이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자식들도 아간의 짓을 알았을 것이고, 잘못에 대해서 묵시적 동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 3만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성읍 뒤로 가서 매복하도록 하고, 여호수아와
그의 군사 몇 명은 성으로 가서 싸움을 걸었다. 매복은 아이성의 서쪽에 5000명이 매복하고, 북쪽에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나머지 주력부대가
매복하고 있었다. 여호수아가 거짓으로 패하는 것 처럼하여 도주하니 아이성에 있던 군인들이 성안에서 모두
나오고 성문도 열어놓고 공격을 하는 어리섞은 행동을 하게 된다.
문을 열어놓고 나간 덕분에 복병이
성에 들어가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아이성의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자 도망가기 시작했는데, 여호수아와 주력부대가 공격을 해서 아이 왕이 포로가 되었다. 아이
사람 2000명의 남녀가 죽었다. 그리고 아이를 불살라 무더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에발산에서 제단을 만들고 율법을 낭독하였다. 항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긋나지 않도록 지침을 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계속 지켜보고 간섭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다. 아모리 족속의 5개 국가와의 전투
아모리 족속 다섯왕 즉, 예루살렘왕, 헤브론왕, 야르뭇왕, 라기스왕, 에글론왕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본의 아니게 기브온과 잘못 외교관계를 하므로서 위의 다섯왕이 기브온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이 기브온의 원군 요청에 따라 전쟁을 하게된다.
기브온은 이스라엘의 과거 행적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될테니 외교관계를 맺자고 거짓으로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화친조약을 맺고 말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졸지에 기브온을 치고 싶어도 치지 못하게 되자 회중이 여호수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위의 다섯 왕이 기브온과 이스라엘이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에 연합하여 기브온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기브온의 원군 요청을 허락하셨다. 말하자면 원군의 형식으로 다섯 왕을 진멸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덩이를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고”(수10:11),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태양과 달이 지지 않도록 요청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수10:13)라고 하였다.
야살의 책(세펠 하야솰)이란 의로운 자의 책이란 뜻이며, 사무엘하 1장 18절에도
언급되고 있는데, 민수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전쟁기”(민21:14)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협과 아르논 골짜기와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의 전쟁기를 야살이 보완하고 완성했을 것이다.
기록은 없지만 정경 외에 이스라엘
역사와 민족적 자료들을 연대기에 따라 수록한 고대 역사수집 문서라고 할 수 있는데, 히스기야 시대에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은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십도가 뒤로 물러 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니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 20:11)
여호수아나 이사야가 언급한 내용은
분명히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이적가운데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부터가 그렇다. 성령으로
잉태한 것부터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초기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생명나무이다.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고 하겠다.
자연의 법칙은 어떤 일반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사람이 발견한 것이지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발견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것이지만 그 사실이 영원불멸의 진리는 아닌 것이다. 과거에는
완전한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는 것처럼, 예를 들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발견의 차이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에서부터 현 세대까지 발견한 모든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지식과 지혜의
수준은 또 다른 미래의 순간에서는 매우 낮은 수준이 될 것이다.
라. 가나안 북방민족 및 주변 연합국과의 전투
하솔왕 야빈, 마돈왕 요밥, 시므론왕 악삽왕, 북쪽산지의
왕, 긴네롯 남쪽 아라바의 왕과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이 연합하고, 동 서에 있는 아모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산지의 여부스 족속,
미스바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과 대 연합을 이루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왔다. 그들은
메롬 물가에 진을 쳤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여호수아와 모든 군사가
메롬 물가를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모조리 전멸시키는 대 전과를 올리게 된다. 그리고 네겝과 고센 땅, 아라바,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브온의 히위 족속이었다. 기브온과는 화친조약을 맺었으므로, 이스라엘이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기브온 히위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온 것이다. 여호수아가 전 군대와 더불어 그들을 진멸시켜버렸다.
마. 기업 분배
여호수아가 나이가 들어 정복하지 못한
땅이 있었는데, 블레셋족, 그술족, 가사족, 아스돗족, 아스글론족, 가드족, 에글론족, 아위족, 므아라족, 그발족의 땅, 바알갓에서
하맛까지의 땅, 시돈사람들의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쫒아내겠다고 하시면서 땅을 먼저 분배하라고 하셨다. 아마도 분배된 지파별로 땅을 지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단 동쪽에는 므낫세 절반 지파와
르우벤 갓 지파에게 분배되었는데, 그술과 마아갓 족속을 쫒아내지 못하였고, 요단 서쪽에는 므낫세 절반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여리고로부터 벧엘 산지, 벧엘로부터 루스, 아렉족
경계까지, 서쪽은 야블렛족의 경계까지였다,
그러나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쫒아내지 못하였다. 므낫세 절반 지파는 길르앗과 바산을 받았으며, 잇사갈과 아셀에도 분깃이 있었는데, 벧 스안, 이블르암, 돌, 다아낙, 므깃도 지역이라 그런데 역시 그곳에서 살았던 가나안족속을 쫒아내지 못하였다.
유다 지파는 남쪽으로 에돔 경계에
이르고, 신 광야 및 염해의 해안까지 분배받았다. 여호수아가
유다지파 중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헤브론을 주었는데, 아낙의 자손을 쫒아내고, 조카 옷니엘로 하여금 드빌(기럇 세벨)을 쳤다. 그리고 갈렙은 자기 딸 악사를 공로로 조카 옷니엘에게 주어
결혼시킨다. 그런데 유다자손이 예루살렘 주 중 여부스 족속을 완전히 쫒아내지 못하였다.
베냐민 지파는 북방 요단에서 여리고
북쪽, 서쪽으로는 산지에서 벧아웬, 루스(벧엘)아다롯, 앗달 등이며, 남으로는 기럇 여아림, 넵도아, 시므온
자손은 브엘세바의 세바와 몰라다, 하살수알, 발라,에셈, 엘돌랏, 호르미
등이었다. 스불론 지파는 서족으로 마랄라, 답베셋, 욕느암, 동으로는 엣 가신, 네아, 림몬, 북으로는 한나돈, 입다엘
골짜기 등이었다.
잇사갈 지파는 이스르엘, 그술롯, 수넴, 하바라임, 시온, 아나하랏 등이었다. 아셀
지파는 헬갓, 할리, 베덴,
악삽 등이었다. 납달리 지파는 헬렙, 사아난님, 아다미, 네겝, 얍느엘
등 이었다. 단 지파는 에스다올, 이르세메스, 사알랍빈 등이었다.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에서 옛날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했다는데 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절반 지파가 가나안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요단가에 제단을 쌓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를 듣자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그들과 싸우고자 했다. 징계차원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그 곳에 보내매 열두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뽑아서 12명과 함께 갔는데, 이들은 천부장들이었다.
그들이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따지니,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친히 벌하소서”(수22:23)라고 말했다. 제단을
쌓은 것은 번제나 제사를 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그들의 말을 좋게 받아드려 돌아와
보고를 하였는데, 다시는 그들과 싸워 그 단을 멸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후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이 제단을 엣이라 불렀다(수22:34)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 지파들간의
화목을 강조하고 있다. 화목의 방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31절 말씀에서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죄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
바. 가나안땅에서 기업확보를 위한 지속된 싸움
유다지파는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전멸시키고, 호르마라고 지명을 개칭한다. 그리고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점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산지 주민은 다 쫒아내었는데, 골짜기 주민은 쫒아내지를 못했다고
하였다.(삿1:17-19)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쫒아내지 못했다.에브라임의 요셉 가문은 벧엘을 점령했지만 성읍의 한 사람 덕분에 성읍을
점령하므로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살려두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므낫세 지파는 다아낙, 돌, 아블르암, 므깃도의 가나안 족속을 쫒아내지 못했다.
가나안 족속들은 더욱 합심하여 게셀에서 집단 거주했다. 스불론 지파는 기드론, 나할롤의 가나안 족속을 쫒아내지 못하였다. 아셀은 악고, 시돈, 알랍, 악십, 헬바, 아빅, 르홉 주민을 쫒아내지 못했다. 납달리는 벧세메스, 벳아낫을 쫒아내지 못하고 그들을 노역에 활용했다고 한다.
신명기 7장 1-5절「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나샬)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나카)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하람) 그들과 어떤 언약(베리트)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하난)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탄)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나타는 정복하다, 나샬은
잡아뜯다, 벗기다, 던지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일곱 족속은 죄의 몸, 옛사람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로마서 6장 6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심을 퍼부어셨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죄의 몸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몸은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이며, 죄의 몸의 죽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곱 족속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일곱 족속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희생양과 같은 존재가
되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일곱
족속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이며, 새롭게 시작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양인 것이다.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하람)” 하람은 격리하다, 제물로 바치다(봉헌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먼저 어린양을 잡고(나카), 껍질을 벗겨 각을 뜨고(나샬),
불에 태워 제물로 드리는(하람) 모양이다.
“그들과 어떤 언약(베리트)도
하지 말 것이요” 인간들은 육적으로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율법 아래 놓인 자들인 것이다. 베리트는 계약(고기조각들 사이로 지나감으로 맺어지기 때문에) 동맹, 연합, 계약, 연맹 등의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횃불 언약을 맺을
때, 동물을 반으로 쪼개놓고 하나님의 불에 그 사이로 지나간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또 다른 언약을 맺으면, 이는
영적 간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을 불쌍히(하난) 여기지도 말 것이며” 하난은 은혜를 베풀다, 기도하다 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육은 이와 같이 모든 인류가 저지른 죄의 몸인 것이다. 따라서 죄의 몸은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하신 것이다.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대적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장 24-25절「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육체를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 죽으신 육체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말하는데, 그래서
신도 역시 죽은 후 육체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오늘날 기복신앙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기복신앙은 세상에서 육체가 잘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과 혼인하지도(하탄) 말지니” 하탄은 딸을 넘겨주다 라는 의미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육을 사랑하고 사탄이 원하는 길을 간다면 이는 영적 간음이 된다. 다른
언약은 곧 이전의 육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옛사람과 새사람은 완전히 서로 다른 존재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첫사람)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마지막 사람)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첫사람 아담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불러 일으켜 자신의 신으로 삼고자 한다면, 이는 옛사람이 죽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죽은 자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초혼이라고 하는데, 사울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을 때 엔돌무당을
찾아가 죽었던 사무엘을 불러 오는 장면이 연상되는 것이다. 신도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오늘날 신도들은 부활에는 관심없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일으키는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인 신도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본적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각자 자신의 의도대로 믿음대로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게 하나님이라고 우상숭배한 이스라엘 처럼, 자신을
위한 하나님을 만든다면, 이는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는 만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그 나무를 말라 죽게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신도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이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헌신의 열매,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 등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 것인가를 연구한다. 하나님은 열매맺지 못하는 옛사람은 죽으라는 것이다.
신도가 열매맺어야 하는 것은 부활생명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에게 열매맺도록 노력할
것이 아니라, 옛사람인 그 나무를 베어버려야 하고 새생명인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생명이 없는 믿음은 헛 믿음에 불과하고,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 설교자인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설교가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가짜 목사들이 말하는 설교는 다른 종교에서도 유사하게
말을 하기 때문이다. 열매맺기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그런 말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우리 옛사람을 이와 같이 하면 된다. 날마다
죽노라를 기억해야만 한다.
(3) 사사시대 그리스도의 상징
(총론)
①구원자로서의 사사:
사사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재판한다, 다스린다, 구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억압을 받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역할을 했다. 이는 미래에 오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예표하는 것이다.
②성령의 임재와 구원: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 구원해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성령의 임재와 그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성령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
③영적 각성과 깨우침:
사사들은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영적 암흑기 속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외치고, 메시아의 계보를 준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또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연결된다.
④미래에 대한 희망:
사사들은 영적 타락 속에서도 무명한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상황)
사사기 2장 8-10절『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후 그들을 인도하던 영적 지도자 여호수아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수아의 죽음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그들에게
위기가 될 수도 있다.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만났던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여호수아
시대의 서막이었다. 모세의 죽음이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이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백십은 십일과
같은 개념이다. 십이는 열두 지파, 열두 사도를 의미하지만, 그 하나가 부족한 것이다. 사사기에는 십일이라는 숫자가 계속 등장한다. 영적으로 부족한 것을 나타낸다. 심판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사기 17장 3절에서『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예레미야
39장 2절에서『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여호수아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떠나버렸다. 마치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당시 가나안의 신들인 바알, 아스다롯과 사랑에 빠진 모습이다.
여호수아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경험하였다.
비록 출애굽 1세대(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의 성인들)는 광야에서 다 죽고 출애굽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는 모두 출애굽 1.5세대, 또는 광야세대였다. 그들은 어릴 때 부모를 따라서 광야로 나왔거나 광야생활 중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경이로운 출애굽의 기적을 직 간접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맛나와 메추라기로 매일마다 자신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자신들보다 더 강한 가나안 원주민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믿기지 않을 놀라운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한 출애굽1.5세대와 광야세대의 사람들이 다 죽고나자, 다음 세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모님 세대의 하나님, 할아버지 세대의 하나님으로 이해했지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뜻이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라고 말한다. 여호와를 믿고 예배를 드리는데, 사실상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신을 따르는 것이다. 다른 신을 여호와라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정말 참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야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도 좋고 세상의 복도 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데, 여호와의
눈에는 그들이 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행하는 것이다. 자기의 소견은 말 그대로 자기가 생각하고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사사기 2장 11-13절『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이 참된 신, 곧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살아 계신 여호와를
버렸다.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는 영적 간음행위이다. "바알"은 주인이란 뜻인데 이스라엘 주위에 있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이었다. 그리고 "아스다롯(다산의 신)"은 역시 그들이 섬기는 여신이었다. 출애굽기(4:16)는 아세라 신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이 두 가지 우상을 풍년들게 하는 신으로 섬겼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그렇게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서 이런 미신으로 타락했는 이유는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와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믿었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는 풍요의 신도 섬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사사기 2장 14-15절『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라)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셨으므로 그들이 즉시 이방 세력에게 삼키웠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 교회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 신약 교회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히 섬기면, 결국 하나님을 떠나 세속화되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란 문구에 있어서 "가든지"란 말은 전쟁터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왕하 18:7 ; 신 28:25)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패전하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고하셨다. 누구든지 그를 믿지 않는 것은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재앙이라고 번역된 “라”는 악을 의미한다.
사사기 2장 16-17절『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지도자로 사사(셰파트)를 세워 주셨으나 그들이 극히 타락했을 때에는 사사의 지도자도 순종하지 않았다. "사사"란 말의 히브리어는 재판하는 자를 가리키지만, 이는 일반 국가 행정에 속하는 재판장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을 "사사"라고 번역함보다는 구원자란 뜻을 내포하는 심판자 라고 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사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자기가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
눈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이다.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쫓아" "다른 신들을 쫓아 음란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음란하여"란 말은 그들이 하나님도
좋고 세상의 풍요도 기원하는 그런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가리켜서 음란한 자라고
하시는 이유가 바로 영적 간음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속히 치우쳐 "속히"란 말은 얼마 전까지 하나님 여호와를 공경하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속히 타락했을까 함이다. 세상에 살면서 어려움이 봉착되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열중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의 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치우쳐"란 말은 배반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믿지만, 다른 신도 믿는 그런 상태이다. 결국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쫓는 배신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이 영적 간음인 것이다.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사사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신실했던
선조들처럼 행치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웠을 때와 사사가
없을 때의 이스라엘 모습)
사사기 2장 18절『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사사의 구원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지적한다.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이 말씀은 그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사실이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사실이다.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네아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동기에
대하여 가르친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네아카)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부르짖는다는 것은 고통 소리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대적으로부터 압박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세상에 갇혀 있는 고통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사사를 세우신 동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스러운 기도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슬피 부르짖으므로."
곧, 그들이 애달프게 간구했다는 것이다. 죄인이라도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에서, 돌이키다 라는
히브리어는 나함(ִָּנָּחֵ֤ם)이다. 나함은 돌이키다
라는 의미보다 불쌍히 여겼다라는 것이다. 나함은 창세기 6장
6절에서도 나온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나함)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사기 2장 19절『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샤하쇼페트)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히브리어로 하쇼페트의 기본형은 샤하트이다. 창세기
6장(노아의 홍수)에서
타락하다는 샤하트(7843)가 등장한다. 기본어근은 부패하다’, 즉(사역동사로)망하다, (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난타하다, 버리다, 그르치다(타락자, 부패한 것), 파괴하다(파괴자, 파괴), 잃다, 방치하다, 부패하다, 엎지르다, 더럽히는
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부패하다(샤하트)는 말은 신명기 4장 16절에
등장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우상을 섬기는 것이 부패한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7절에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고린도전서 3장 17절에서『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헬라어:프데이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프데이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더렵힌 자체가
멸망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프데이로) 두려워하노라』프데이로는 영적 간음을 의미한다.
사사기 2장 20-22절『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죽은 뒤에 다시 우상을 섬기며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강퍅해진 사실을 지적한다.
사사기 2장 17절에서『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자나)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자나는 창녀 짓을 했다는 말이다.
사사기 2장 23절『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이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의 거민, 곧 여호수아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던
그 족속들을 더 이상 쫓아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시는 목적을 밝혀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여기 "시험"이란 말은 시련을 의미한다. "시험하려 함이라"고 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할 때에 그 땅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으로 인하여 연단을 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준다. 이 말은 시험의 목적이
가르치는 것이다. 사사기 3장 1-2절에서 의미를 설명한다.『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사사들의 행적)
①옷니엘
사사기 3장 7절『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잊어버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카흐의 뜻은 “잘못 놓다”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고 마음 바깥에 내다 놓으므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망각한 것을 가리킨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던 가나안의 신이다. 그리고 아세라는 신의 어머니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지역에 따라 여러 모앙, 여러 이름으로 섬겨지던
바알과 아세라를 자기의 이웃들과 더불어 섬겼던 것이다. 이게 하나님 눈에 보기에 악인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눈과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은 다른 방향으로 간다. 사람들은 세상의 풍요를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다.
사사기 3장 8절『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하여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메소보다미아 왕에게
넘겨주어 그 왕이 8년 동안 지배하도록 했다. 이 왕이 얼마나
악한 왕이었는지 그 이름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리사다임이라는 단어는 죄들이라는 의미다.
구산이라는 왕에 죄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이 왕은 범죄와 분리될 수 없는 악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 고통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사사기 3장 9절『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이기도 했고, 이전에 갈렙의 명을 받아 가나안의 한 성읍을 쳐서 정복했던 적이 있었던 장수였다. 하나님은 옷니엘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사사기 3장 10절에서『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여호와의 영(루아흐
예호와)이란 성령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이 옷니엘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과 능력이 그에게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소명이란 이스라엘 백성을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능력이란 그러한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 옷니엘의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힘이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한편 옷니엘에게 임한 성령은 구약 시대의 여러 인물들에게도 임했던
적이 있다. 여호와의 영은 가끔 백성들 가운데 몇몇 사람에게도 임했으며(민 27:18;단 4:8),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봉사를 수행토록 하기 위해서 임하기도 했다.
사사기 3장 11절『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와 같은 표현은 다른 사사들의 행적을 마무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옷니엘의 활약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그치고 정치적, 종교적으로
평안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백성들은 옷니엘이 죽자 또다시 죄악을 범하는 전철을 되밟는데 그 결과
모압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영웅이 죽었다는 말은 결국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항상 죄에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②에훗
사사기 3장 12절『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또...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은 40여년에 걸친 평화로운 세월을 구가하는 동안, 구산 리사다임의 수하에서 8년간이나 노예 생활하던 때의 비참함을 까맣게 잊어버렸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잘못과 죄의 악순환은 사사기 전반에 걸쳐 되풀이되는 바 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그리고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완악한 백성이었음을 보여
준다.
모압 족속은 출애굽 과정에 있던 이스라엘이 그 지경을 통과하고자
요청할 때 이를 거절했었다. 그리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 앞에서 음란히 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암몬과 모압
사람을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명기 23장 3-6절에서 명령하신 적이 있다. 에글론 이름의 뜻은 젊은 황소이다.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 초기 당시 모압의 왕이었던 자로서 여리고 부근의 요단 강서부 지역을 한때 강점하였었다.
“강성케 하다”에 해당하는 하자크는 돕다, 붙잡다는 뜻이다. 이는 곧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도리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려고 잡은 손을 놓으시고 대신 모압을 권능의 손으로 붙드신 것을 의미한다.
사사기 3장 13절「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암몬은 롯과 그 둘째 딸 사이에서 난 암몬을 조상으로 하는 족속이다. 따라서 모압 족속과는 형제국이 된다. 이들은 모압 북방의 랍바를
중심한 지역에 거주하였는데 곧 요단 동편 지방이다. 이들은 역사상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일찍이 모압 족속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을 저지하려 방해하기도 하였다.
아말렉 자손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을 조상으로 하는 족속이다. 이들의 거주지는 팔레스틴 남방에서 시내 반도에까지 이르는 광야지대였다. 이들은
사사 시대 동안 미디안과 화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기드온에게 격멸당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사사기 3장 14-15절「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이스라엘 전체가 모압 왕 에글론을 섬긴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비록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에글론을 섬긴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적 특성 때문에 그처럼 표현한 듯하다. 즉 이스라엘은 비록 몇몇 개인이나 지파가 범죄하였어도 연대 책임을 강조,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으로 곧잘 간주하였던 것이다.
“베냐민 사람...에훗” 이스라엘의 제2대 사사인 에훗이 베냐민 출신이란 점은 당시 에글론의 압제하에 있던 여리고 성이 곧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할당되었던 성읍이다.
“왼손잡이”히브리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는 오른 손이 묶인 남자란 뜻이다. 때문에 이를
오른손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이를 '암포테로덱씨오스', 즉 양손잡이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비해 왼손이 발달된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베냐민 지파중에 왼손잡이가 700명이나 있었던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사사기 20장 16절에서도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왼손잡이는 당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자로 여겨졌다. 따라서
모압왕 에글론은 에훗에 대해서 긴장을 늦추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를 의탁하여'란 말은 베야도 로서 '그의 감독하에' 또는 '그를
통하여'란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공물바치는
일을 에홋이 관리, 감독하였음을 의미한다. 공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느하의 뜻은 예물, 선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속국의 백성들이 종주국에게 바치는 조공을 가리킨다.
사사기 3장 16-17절「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에훗이 칼을 오른쪽 다리 옷 속에 숨겼다가 왼손으로 빼어 사용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칼은 일반 규빗으로 한 규빗인 칼이었던 것 같다.“좌우에 날선 칼” 칼'에
해당하는 '헤레브'는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예리한 도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에훗이 준비한 칼도 예리하게 양날을 세운 검이었다.
에훗이 왼손잡이로 왼손으로 단검을 뺄 때, 모압왕 에글론은 순간 대처하기에 당황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른손으로 칼을 빼는데, 왼손으로 칼을 빼므로 대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내용을 신약성경에 적용해 보면 고린도전서 1장 28절에서『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구원자가 그렇다는 말이다.
비둔한에 해당하는 “바리”는 통통한, 배부른, 풍성한 등의 뜻으로 살이 비정상적으로 찐 상태를 의미한다. 에글론의 의미는 젊은 소라는 것이다. 에글론은 참으로 비만한 자였는데
그것은 그가 에훗의 칼에 찔렸을 때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던 점으로서도 알 수 있다.
사사기 3장 18절「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슈브)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슈브는 돌아와서 라고 번역되었지만, 회개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길갈은 성경에는 이름은 같으나 실제로는
다른 곳인 길갈이 여러 곳 나온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사무엘의 순회 통치지이기도 하였던(삼상 7:16) 여리고 근처의 길갈을 가리키는 듯하다. “돌 뜨는 곳” 이란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실림의 기본
뜻은 새기다이다. 즉 새겨진 우상들이다. 이 단어의 단수형
페셀 역시 새겨진 형상을 의미한다. “은밀한 일”은 신의 계시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에글론이 신의 계시를 생각하고 신하들을 물러가게 했다.
사사기 3장 20-22절「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다바르)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타카)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에홋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로
세우실 때, 이미 그에게 에글론을 죽이고 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명이란 바로 그러한 명령을 가리킨다. 에훗이
모압과의 전투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사람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28절)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같은 소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훗의 말이 매우 비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여 더욱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에홋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좌석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훗이...왕의 몸을 찌르매” 에글론에게 전달될 하나님의 명령이 에글론의 귀가 아닌 가슴에 즉각적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칼자루도...등뒤까지 나갔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칼날이 에훗에 의해 힘있게 에글론의 몸에 꼽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물(똥)이 나왔다. 우리말 번역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kjv에는 오물로 번역되었다.
And the haft also
went in after the blade; and the fat closed upon the blade, so that
he could not draw the dagger out of his belly; and the dirt came out.(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고 기름이 칼날에 모이므로 그가 칼을 그의 배에서 빼지 못하여 오물이 나오더라) kjv(삿3:22)
“칼을...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에글론에게 내리신 심판을 거두지
아니하시므로 죽음의 저주가 끝까지 에글론과 함께 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홋은 엄연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에글론을 응징하였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통하여 사탄을 응징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사사기 3장 23-25절「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뒤에서 닫아
잠그니라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들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었더라』
에홋은 암살을 은폐하기 위해서 다락방에 있는 문들을 닫아 잠갔다. 다락방 안에 왕이 있을지라도 문이 잠겨 있으면 신하들이 왕의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점을 에훗은 십분
이용한 것이다. “발을 가리우신다” 이 말은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으로 사람의
생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즉 이 말은 '용변을
보다' 또는 '잠을 자다',
'휴식을 취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삼상 24:8에서도 이 같은 말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용변을 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히브리어(와야히루
아드 보쉬)에는 “그리고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 로 나와 있다. 신하들은 왕이 오랫동안 용변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왕이 너무 오래동안 지체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자신들이 방심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사기 3장 26-27절「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타카)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스이라” 는 에브라임 산지의 어느 한 곳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곳은
에훗이 추적자들로부터 피하기 쉬운 곳이다.
에브라임 산지는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중 울창한 삼림이 있는
구릉 지대를 일컫는다. 이곳은 가나안 중부에 위치한 곳으로 대개 에스드랠론 평지에서부터 유다 산지와
맞닿는 지점까지의 지역을 가리킨다(수 16:1). 비교적
토양이 비옥한 곳이었으므로 수확물도 많이 났었다고 한다. 에훗이 나팔을 분 것은 백성들을 소집할 뿐
아니라, 동시에 전쟁과 같은 비상 사태를 선포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타카는
찌르다 라는 의미와 나팔을 분다는 것과 같이 사용되었다. 결국 영적으로 전쟁은 말씀의 전쟁인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의 전쟁을 내포하고 있다. 시편 149편 6절에서『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사사기 3장 28절「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붙이셨느니라” 이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권능을 확신한 지도자 에홋이 이스라엘을 통솔한 것은 당시 이미 자기들의 왕 에글론을 잃고 지휘 체제를 갖추지 못한 모압군과는 대조적인 장면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스라엘은 모압군 일만명 가량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29절).
요단강 나루는 모압땅 맞은 편, 여리고 앞의 요단 강
어느 한 지점이다. 한편 에훗이 이처럼 요단 강나루를 지킨 데에는 이중 목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있던 모압군이 강을 건너 모압땅으로 도망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압 본토에서부터 소식을 들은 모압인들이 요단강을 넘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에훗의 봉쇄 작전은 주효하였는바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침입하였던 모압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사사기 3장29-30절「그 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다 역사요 용사라” 여기서 역사는 원어로 '솨멘'으로서 신체적으로 강한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용사는 '하일'로
전쟁에 능한 용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재산이나 권세 같은 것을 갖추어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도 의미한다.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이는 이스라엘이 사사 옷니엘의 치하에서
누렸던 태평 시대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전 사사 시대를 걸쳐서도 한 사사 밑에서 가장
긴 평화를 누렸던 기간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에훗이라는 사사를 통해서 모압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이
팔십년을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에글론은 바로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임금인
사탄을 상징한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도 육적인 자아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육적인 자아가 바로 에글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칼로 세상 임금인 에글론을 은밀하게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신이 되는 육적 자아가 주인이
될 때는 마음에 평화가 없다. 그러나 육적 자아를 죽일 때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 팔은 새창조를 상징한다.
③삼갈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에훗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왼손잡이였다. 하나님은 에훗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고, 80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게 하셨다. 에훗 다음에 삼갈이라는 사람이 사사가 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단 한 줄 기록이 있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삼갈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그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지만, 소 모는 막대기를 사용한 것을 보면, 잘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정도는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상황이 농민들이 싸움에 나설 정도로 피폐해진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준다.
사사기 5장 6절에서『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해안 쪽에는 큰 대로가 있는데, 사람들은 오솔길을 다녔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린 것이다.
사사기 4장 1-3절을
보면,『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소 모는 막대기는 당시 팔레스틴이나 수리아에서는 밭을 갈 때
길이 약 2.5m 정도되는 둥글고 두꺼운 막대기를 사용하였다 한다. 그
막대기의 한쪽 끝은 뾰족해서 소를 몰 때 찌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며 다른 쪽 끝에는 조그마한 삽이 달려 있어서 밭을 손질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삼갈이 이처럼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막대기를 가지고 600명의 블레셋인들을 물리쳤다는 것은 또 다시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증거해 준다.
소를 모는 막대에서 삼갈은 농민을 상징하는 것이다. 농민은 당시에 가장 보편적인 직업이었을 것이다. 농민이 막대를 들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헷족속의 왕 중에서 삼갈이라는 자가 있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는 표현에서도 삼갈이 이방인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도저히 불가능한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보여준다. 히브리어에서 막대기는 “라메드”로서 가르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모세도 하나님의 능력이신 지팡이를 들었다. 육백이라는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13장 17-18절에서
설명한다.『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ἑξακόσιοι ἑξήκοντα ἕξ)』육백육십육(666)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은 600(ἑξακόσιοι), 60(ἑξήκοντα), 6(ἕξ)으로 되어 있다. 육백, 육십, 육은 모두
육이라는 숫자를 기본으로 한다.
육이 짐승의 숫자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매매는 상업적인 매매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의 매매이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 팔았다. 표가 없으면 매매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다 쫒아내버린 것이다.
육은 창세기 1장에서 짐승과 사람이
같은 날 창조되었는데,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돕는 베필이
오지 않은 존재가 바로 짐승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만날 때 사람(칠)이 되는 것이다. 육은
만남의 숫자이다. 육은 짐승을 의미하며, 불완전한 숫자인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2-3절에서『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도피성도 여섯개이다. 골리앗의
키가 육규빗이다. 골리앗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육백세겔이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이 세로로 육십 규빗이었고 가로는 육 규빗이었다.
육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난 거짓 선지자들이 퍼뜨리는
말인 것이다. 짐승이 주는 변질된 말이 육육육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전할 때, 호 로고스가 아니라 그냥 로고스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종교 장사를 하던 자는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 그룹들이었다.
마태복음 8장 44절에서『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마귀의 자식인 것이다.
거짓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영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육육육은 짐승들이 주는 표(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 인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을 말하지
못할 때 바로 육육육이 되는 것이다. 육육육은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는 비진리의 말이다. 이 비진리의 말이 이마와 손에 표를 주는 것은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왜곡해서 거짓 교리, 전통, 유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육육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사기는 전쟁으로 표현되지만 영적으로는 말씀의 전쟁이다. 진리와
비진리의 전쟁인 것이다. 사도행전 26장 14-15절에서『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캔트론)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캔트론은 몰이 막대기라는 의미다. 농부가 소를 모는 막대기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소를 모는 막대기를
들었고, 사울은 막대기에 찔리는 소라는 것이다. 사울이 사도바울이
되는 것은 마치 비진리에 서 있던 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엄청난 수고와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민수기 17장 8-9절에서『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아몬드) 열매가 열렸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집어들었더라』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삼갈이 든 막대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막대는 생명나무와 같은 것이다. 모세가 막대기를 들고 애굽의 바로에게
가는 것이다.
④여선지자 드보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악을
범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모압왕 에글론으로 부터 18년동안 압제를 당하며 고통을 겪었다. 그러자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에훗을 사사로 세워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4장은 사사 에훗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에훗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대행한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또 다시 이스라엘이 타락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니 에훗의 치하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평화(3:30) 역시 끝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하솔은 가나안 성읍 중 하나로서 강력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에
해당하였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메롬 호수 부근으로, 이전에
이미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납달리 지파의 지배하에 있었다. 야빈이란 말은 애굽 왕의 공식
칭호인 바로나 블레셋 왕의 공식 칭호인 아비멜렉처럼 하솔 지역 왕을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다. 세상 왕의
상징이다.
개역개정 “이방 하로셋”라고 표현된 히브리어는 바하로셋(하로세) 학고임(고이)” 이다. 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기본형)은 열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하로셋에 거하던 가나안 여러 족속을 지칭한다. 한편 하로셋이란
지명은 성경 중 이곳에만 나온다. 신약성경에는 이 지역을 갈릴리라고 한다. 이방 땅이지만, 하나님이 구원의 빛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이 있다.
이사야 9장 1절에서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그리고 마태복음 4장
14-15절에서『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갈릴리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다.
세상 임금을 상징하는 시스라가 그 곳에 거주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흑암에 처해있는 모습이다. 시스라가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그곳에 지배하던 왕(야빈)이었던 시스라는 철병거를 가졌다. 철병거는 고대 전투에서 철제 병기의 사용은 전략 전술에 못지
않게 승리의 관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무기를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철병거를 지닌
가나안 거민 중 많은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평야 지대를 많이 점령치 못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철병거는 산악 지대에서는 사용될 수 없고 오직 평야 지대에서만 사용되는 전투 장비이기 때문이다. 철병거가 구백이라는 숫자는 천에 모자란다. 결국 하나님의 군대와
비유되는 말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전체 12지파를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하솔을 중심한 일대의 납달리지파
내지 그 지파를 중심한 북부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츠는 '비틀어 짜다'는 뜻이다. 이는
곧 포도즙을 짜기 위해 밟아 으깨듯 이스라엘에 대한 야빈의 압제가 매우 혹독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사기 4장 4-5절『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녀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랍비돗이란 이름의 뜻은 번개 또는 횃불이다. 랍비돗의
아내란 말은 불꽃과 같은 여인...드보라이다. 성경에서 여자로서
선지자직을 감당한 자로는 드보라 외에도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훌다(왕하 22:14)를 들 수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적 기능을
은사로 받았던 것이다.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꿀벌은
꿀과 쏘는 침을 떠올릴 수 있다. 꿀은 말씀을 상징한다. 다바르(말씀)는 드보라와 연관된다. 침은
쏘는 무기다. 사망이 쏜다.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에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녀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에서, “에브라임 산지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예루살렘북쪽 약9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선지자 사무엘의 집이 라마에 있었다.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가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마 2:18)라고 읊었던 라마가 바로 이곳이다. 베델은 성막이 있었던 곳이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란 이름은 드보라가 종려나무(타마르) 아래서 재판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타마르는 다말에서 비롯된다. 종려나무는 다산을 의미하며, 부활과 승리의 상징한다. 그래서 “바로 세운다”는 의미를 갖는다. 종려나무는 성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그녀가 재판시마다 그곳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사 시대 당시 재판하는 일은 사사의 임무 중 하나였다.
사사는 전쟁 시에 자기 민족의 구원자 역할을 담당했지만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했다. 특별히
드보라는 여자로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대언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드보라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여선지(이솨 네비아)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야빈의 군대를 기손
강가로 유인해 오도록 명령하셨다. 승리할 수 있는 전략적 지역으로 상대를 이끌어 오는 전술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에 따라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으로 있던 바락을 불러 적들을 기손 강가로 오게
하는 병법을 알려주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다. 이 전쟁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자 만 명의 군사를 이끌어야 함에
부담을 느낀 바락은 출정에 주저하게 되고 결국 드보라에게 동행을 요청한다. 그러자 드보라는 그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 결국 전쟁의 승리에서 오는 영광은 야엘이라는 한 여인에게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한다. 결국
그녀의 예언처럼 야빈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스라는 한낱 필부였던 한 여인, 야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 그 영광이 그녀에게 돌려지게 된다.
하나님의 친히 싸워주심 속에 결국 이스라엘은
기손 강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야빈의 군 지휘관이었던 시스라는 패전후 도망을 치다 결국 겐
사람 헤벨의 아내였던 평범한 여인 야엘에 의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드보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전쟁은 마무리되고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죄악을 범했던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가나안 왕 야빈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그 일은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기 위함이 아니셨다. 고난을 통해 그들을 영적으로 단련해 나가기 위한 선하신 계획의 일환이셨다. 반대로
잠시 사용하셨던 악인 야빈왕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결국 멸망당하게 된다.
그녀가 멀리 북쪽 지방인 납달리 게데스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바락을
부른 것은 곧 지파간을 초월한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 준다. 즉 드보라는 비록 자기 지파가 아니었지만
당시 납달리 및 북쪽 지방의 지파들이 야빈의 압제하에 당하는 고통을 간과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납달리 출신의 사사 바락을 불러 문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는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지파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이 전투에는 납달리, 스불론 지파와 인접한 잇사갈 지파도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⑤기드온
사사기 6장
1절『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여호와의 눈에 보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목전에 행한 악은 어떤 도덕적인 범죄라기 보다 우상 숭배였다.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지도자인 사사들이 살아 있을 동안 우상 숭배에서 멀어졌던 것 같으나 사사의 치리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처럼 타락,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던 역사가 곧 사사 시대였다.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난 후손들이다.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며 외국과도 무역을 했다. 요셉이 바로 이러한
생활을 하던 미디안 족속에게 팔렸다. 한편 이러한 미디안 족속이 거하던 땅은 모세와 아주 중요한 연관을
맺기도 하였다. 즉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친 곳이 곧 미디안 땅인데 그는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었다. 미디안 땅의 경계는 정확하지않으나 대개 엘란 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만 일대이다.
그런데 간혹 모압 경계선 북부나 시내 반도 부근으로까지 그 경계가
확장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미디안족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시에 모압 족속과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대패를 당하고 만다. 그런 자들이 본문에서처럼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니 비록 칠년 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때보다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별하심이다. 여호와의 눈에 보기에 악하다라는 것이
심판인 것이다. 미디안에 넘어가는 것은 우상 숭배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자의 생활은 사탄의 지배와 같은 것이다. 칠년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하는데, 완전한 고통을 의미한다.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하게
한다.
여호와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찾아왔다. 기드온이 대단한 인물이라서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용사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디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숨어서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 타작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의 입을 통해서 기드온에게 반드시 내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웠다. “하야 아세르 하야”(나는 나다:나만이 존재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반드시 전쟁에 이기는데,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기도온에게 표징을 하나 보여주셨다. 천사가 기드온이
대접한 음식을 먹는 대신에 불로 태운다. 즉 불로 응답하는 모습이다.
모세를 부를 때도 하나님이 불꽃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이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축할 때도 불이 임했다. 신약시대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불이 임한 것이다.
기드온이 표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자 말자, 천사가 순간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기드온은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평안)이라고 불렀다. 샬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기드온이 샬롬의 제단을 쌓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우상의 제단이 있었다. 그 제단은 바알과 아세라
목상이었다. 기드온이 이 우상들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기드온이
세운 제단에 칠년된 둘째 수소를 번제로 드렸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제단의 관리인이었다. 바알은 농사와 관련이
있고, 아세라는 자식이 잘되게 하는 다산의 신이었다. 즉
풍요를 기원하는 우상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예수와 십자가가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히 섬기는 모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신도
역시 기드온처럼 이러한 우상을 마음으로부터 찍어버려야 한다. 첫째 수소는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찍어내야 하는 것이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것이다. 칠년된 둘째 수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어린양의 죽음을 의미한다. 칠년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맸는데, 종들 중 하나가
고해 바친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이런 행위를 한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다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다.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의미다. 그의 아버지는 기드온을 변호했다.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기드온을 다음날 아침까지 바알이 죽일 것이다. 그러니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드온은 죽지 않았고, 백성들은 바알이 능력없는 우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시기 6장 33절에, 드디어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과의 전쟁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전쟁은 우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6장 34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는 것이다. 즉 영적 전쟁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성령)이 특별히 임하였을 때에는 명철과 지혜, 예언, 비상한 능력 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성령이 함께 하신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서, 그가 침략한 대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는다. 기드온이 나팔을 부니,
기드온을 죽이려고 한 자들이 모두 전쟁에 참여했다.
그런데, 기드온은
전쟁에 앞서 다시 한번 표적을 하나님깨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양털과 타작마당을 두고 표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겠다는 것이다. 두번의 표적인데, 첫번째는 양털이
물(이슬)에 젖고, 타작마당
주변은 마르고, 두번째는 양털은 마르고 타작마당의 주변은 물(이슬)이 젖어있는 것이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대한 간구한 것은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에 대한 우상이다. 자연에 대한 순응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연을 뛰어 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자연의 순응과 질서를 통해서 바라보느냐, 아니면, 자연을 통제하고 뛰어 넘는 초월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을 바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헤서,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자연의 법칙, 질서를 통한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이를 넘어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엘로힘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엘로힘은 모든 신을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오직 여호와만 참 하나님인 것이다. “하야 아세르 하야” 인 것이다. 첫사람 아담과 함께 세상에 와서
마지막 사람 아담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상에 살면서 풍요를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죄로부터 해방되는 그래서 이 세상에 영적으로 갇혀있다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타작마당과 양털에서, 타작마당은 추수(세상)와 관계된다. 양털에서
양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타작마당에 이슬이 내라는 것은 풍요의 신이 작동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털에 이슬이 내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생명이 주어지며, 타작마당은 말라버리는 것이다. 세상과 영생은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아라 라는 것이다. 양털에 이슬이 없을 때는 십자가의 죽음 만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죄 속에 있는 것이다. 타작마당에 이슬이 내려 세상의
풍요를 가져준다.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어있는 모습이다.
기드온을 따르는 군사들의 숫자가 많아 그
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두려움을 사용하셨다. 전쟁에서 이기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으로 이긴 것으로 여기지 못하게 하시려고 군대 숫자를 줄이셨다. 전쟁을 앞두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들이 만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기드온에게 아직도 백성이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물가에서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삼백 명으로 기드온과 함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개처럼 물을
핧아먹는 자를 제외하고, 손으로 물을 떠서 핧아마시는 자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을 할 수 있는 자를 선택하신 것이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방법은 삼만이천명의 군사중 99%를 줄여서 단 1%로인 300명만 남게 하신 것이다. 인간의 전쟁이라면 당연히 싸움이 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이었기에 삼백명으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삼만 이천명의 군사에서 99%를 돌려 보내고 300명만 남은 기드온이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기드온과 그 부하 부라가 미디안의 진영까지 들키지
않고, 그것도 꿈과 해몽을 나누는 미디안 병사들의 막사에 정확히 도착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기드온과 그 부하 부라의 발걸음이 좀 늦었거나 좀 빨랐으면
그 미디안 병사들이 이야기하는 꿈과 해몽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이처럼 아주 세밀하고 치밀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기드온의
발걸음과 미디안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추시는 것이다.
미디안 병사의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굴러 왔다고 한다. 당시 보리떡이라는 것은 제일 볼품없는 떡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볼품없는 보리떡은 다름 아닌 기드온이라는 것이다. 기드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자신은 약한 므낫세 지파사람으로 자기 아버지 집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했는데 이처럼 기드온은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기드온이 가진 두려움의 원인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두려움과 열등감을 터치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에 꿈을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기도
하셨다. 기드온과 부라가 적진으로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을 때, 두명의
적병이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만일 기드온이 그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14절과 같이 해몽하였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기드온에게 큰 확신을 주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해몽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 일행이 잠복한 때에 꼭 맞춰 꿈과 해몽을 적병의 입을 빌어 들려주심으로써, 의혹의 여지를 남기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보리떡 한 덩어리” 표면적으로는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장
흔했던 음식으로 비천함을 상징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바 이 보리떡은 넓은 의미로 당시 가난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비천한 가문 출신인 기드온을 상징한다. “한 장막”은 미디안 전체 장막을 의미한다. 특히 장막이라는 표현은 유목민의 거주지이므로 미디안인들에게 잘 어울리는 용어이다.
보리떡의 영적인 의미는 오병이어에서 찾을 수 있다. 오병이어의 참된 영적 의미는 성만찬과 같은 개념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리떡을
먹는 것은 육적 몸은 죽고, 하늘의 생명을 먹고 영적 몸인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육적 장막이 반드시 무너져야만 하는 것을 알려준다. 미디안의
장막은 바로 육적 장막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이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소리쳤을 때 미디안의 모든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진영에서 자기들끼리 칼로 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한밤중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와 항아리 깨지는 소리와 함성, 타오르는 횃불은 미디안 군사들의 마음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디안 군사들의 공포심은 이스라엘의 군사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디안 군사들의 마음에 이미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전쟁은 영적 전쟁으로 우상인
바알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출애굽, 여리고
성을 점령 할 때도 나팔을 부는 (쇼파르)것이 등장한다. 횃불(라피드)은 창세기
15장 7절에서 등장한다.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횃불언약에서 등장한다. 하나님의 죽음(예수
그리스도)을 상징한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십계명)에서도 횃불이
등장한다.
빛은 하나님이시며, 항아리에 빛을 보관했다. 고린도후서 4장 6-7절에서『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인간을 질그릇으로 표현했다. 깨지기
쉬운 항아리 같은 인간의 육체에 하나님이 빛을 두셨는데, 이게 하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항아리에 있는 빛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삼백이라는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옛사람(미디안)은 죽고, 새사람(기드온)은 부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의 압제에 있지만 결국
바알의 우상 앞에 제압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로 압제 당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것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외에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받아드리지 않으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자요 하늘의 생명이 없는 자가 된다.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해서, 육적
자아를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나 라고 생각하는 육적 자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오직 삼백의 군사만이 필요하듯, 육적 자아인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부활하여 새생명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7년간 미디안의 침략에 유린당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기드온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셨고, 미디안과의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3만 2천명 중, 고작 300명을 차출하여 전쟁을 치르게 하셨다. 전쟁의 승패는 숫자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한 뒤, 기드온에게 의외의 일이 생긴다. 에브라임은 전쟁에
자신들이 배제된 것이 서운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전쟁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었는데, 에브라임은 자신들의 공적을 세우고 싶었다. 기드온은 기지를 발휘하여
에브라임이 미디인의 수장, 오렙과 스엡을 붙잡은 그들의 공을 더 높게 평가하자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린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치르신 전쟁을 보면서도, 본질과 무관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미디안의 잔당을 척결하기 위해, 기드온과 300명 용사가 추격했다. 이내 전쟁의 피로가 몰려왔고, 보급품이 떨어졌기에 주변 성채, 숙곳과 브누엘에게 보급품 지원을
부탁한다. 그러나 미디안을 두려워하여 요청을 거절하자 기드온은 엄중한 경고를 하였고, 마침내 하나님 군대의 요청을 거절한 숙곳과 브누엘의 지도자는 도륙과 성읍의 상징, 망대가 헐리는 심판을 맞았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진행하신 일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기보다 기드온의 활약을 눈여겨 보았고,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에게
삶의 주도권, 통치권을 맡기겠다고 했다. 이들의 속내는 기드온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기드온은
자신의 기지와 용기,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잘 알았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이스라엘의 요청을 거절하고, 본질을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기드온이 뜻밖의 행동을 한다.
기드온은 전리품 중, 금 귀고리를 모아 에봇을
만들었다. 에봇은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사용되는 에봇은 하나님의 뜻을 상징한다. 그런 에봇을 미디안과의 전쟁 중, 전리품으로 얻은 금 귀고리로 만든 것은 자신의 업적을 은연 중에 드러내려는 교묘한 전략이었다. 심지어, 황금 에봇을 자신의 성읍에 두므로 기드온은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기드온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영웅이었지만, 자신의
삶에 영웅은 되지 못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첩까지 얻어, 자신의
욕정을 채웠고, 자녀들을 71명이나 낳았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그릇된 영웅심과 권력욕을 바라보며 자라났기에,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배다른 70명의 형제를 도륙하고 왕위에
오르는 참담한 일을 행하게 된다.
기드온의 후손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 거민들과 공모하여 반역을 도모하게된다. 영적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졌다 하더라도,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 타락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육적 자아와 영적 자아는 끊임없이 싸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⑥아비멜렉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에 대한 말씀이다. 여룹바알은『바알과 다툼』이란 뜻의 기드온의 별명으로 기드온의 여러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자기 어머니의 형제들과 어머니 집안의 모든 식구들에게 말한 것이다. 곧 아비멜렉 자기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외갓집 식구들을 부추긴 것이다. 그러자 아비멜렉의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동조하여, 결국 아비멜렉이 돈으로 폭력배들을 사서 기드온의 칠십
아들을 무참하게 죽인 것이다.
7절 이하 21절은 형제들에 대한 아비멜렉의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요담이 축복의 산이었던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세겜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요담이 한 말은 아비멜렉은 결코 왕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닌데 세겜 사람들을
부추겨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사람이 할 도리냐고 세겜 사람들을
질타한 것이다. 그러기에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곧 너희들 또한 서로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주제는 바알에 대해서 고발하는 내용이다. 누가 참 왕인가 라는 내용을 통해서 참 왕은 하나님이시고 바알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알과 아비멜렉은 서로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아비멜렉은 사탄(섹상의 왕)을 상징한다. 세상의
왕 아래 있을 때는 물(말씀)이 없는 불과 같은 곳이지만, 브엘은 물있는 곳이 된다.
교회 신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물(말씀)이 없는 곳은
바알이 지배하는 인본주의 교회에 불과한 것이다. 세겜의 바알들이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황폐한 곳이 되는 것이다. 세겜은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맺은 곳이지만, 세겜사람들이 바알을 섬기므로 세겜바알이 되어 하나님을 저버리는 곳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중에는 진짜와 가짜가 존재한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로 물든 신자들은 가짜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영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자가 참 성도이지만, 가짜들은 육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 모습을 하고 신도들을 군림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는 감람 나무와 포도나무가 되지만, 육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은 가시나무와 같이 신도들을 영적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기드온의
아들 70명 중에 한 사람으로 자기 형제들을 다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의 뜻인 『나의 아버지가 왕이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교만한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왕이 되고자 자기 형제들을 죽이는 악행까지 저지른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그렇게 왕권을 잡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을
때, 아비멜렉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이
말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지만 왕권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몰락하고 말았다는 의미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친척지간이었을
뿐만아니라, 이 둘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을 정도로 아주 밀접한 사이였는데 그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세겜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땅이다. 기드온이 므낫세 지파였기에 세겜은
기드온의 주 활동지역 중 하나였다. 뿐만아니라 세겜에는 아비멜렉의 외갓집이 있었으며, 그의 외삼촌과 외조부의 집안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일등공신 역할은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한 직접적인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둘 사이에 금이 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에 심판자로
임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에 불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당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은 방관자로 지켜만 보고 계신 게 아니라 때가 되면 하나님이 직접 심판자로 개입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성읍 중 가장 큰 성읍이었던
세겜성을 점령한 다음, 세겜 망대로 도망간 백성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한자리에서 천명을 불태워 죽인 아비멜렉은 그것도 양이 차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세겜성보다 작은 성읍인 데베스를 공격한다. 아비멜렉의 공격을 받은 데베스의 백성들은
데베스에 있는 가장 견고한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몸을 피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그 망대마저 불사르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 윗짝을 던졌는데,
그것에 정통으로 맞아 아비멜렉은 두개골이 깨져 거반 죽게 되었다.
맷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된 아비멜렉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여인에게 죽었다는 불명예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의 병기 잡은 소년에게 죽여줄 것을 부탁하여 결국 그 칼에 찔려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파멸의 순서만 달랐을 뿐,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그 이유가 아비멜렉의 죄와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에서도 왕이 되고자 한 것이다.
⑦돌라,
야일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되는
실패의 패턴이 있다. 이방민족의 억압아래 핍박받으며 곤고함 속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들의 어려움과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압제의 현장에서 구해주신다. 사사가 세워져 그들을 다스리는 동안 그들은 평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평안한 시기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곧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이방족속의 지배와 억압 속에서 살아가도록 징계하신다. 이러한 징계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서 그들을 또 다시 구원해주신다. 그리고 평화의 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우상숭배와 죄악의 길로 또 다시 빠져든다. 이 실패의 패턴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반복되고 있다.
10장 초반부에서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방 민족의 억압과 압제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사사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다.
하나님이 사사로 세우신 돌라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과 이방 족속의 지배에서 구원해주시는 데, 이 때 쓰임받은 사사 돌라의 이름의 뜻은
벌레다. 벌레 같은 돌라의 인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23년 동안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두번째 사사의 이름은 야일이다. 사사로 세우신 야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땅은 권세를 누렸다. 그의
아들 30명이 당시 고관들의 통행수단인 나귀를 타고 서른 개의 성읍을 다스렸다. 그 땅에 22년 동안 평화가 임했다. 돌라를 통해서 23년 동안, 그
후 야일을 통해서 또한 22년 동안 도합 45년 동안 하나님의
평화와 변영, 권세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사사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그들은 그 평화의 너머에 자리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죄악에 빠져 버린다.
우상숭배에 빠진 이들의 모습이 처음이 아님을
“다시” 라는 단어가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한 시기, 번영의 시기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어려움에 봉착해서야 하나님을 찾고 눈물로 울부짖는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그들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평화를 찾게 되지만 곧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마치 왕이 없는
것처럼,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상태다.
하나님은 한탄하셨으며, 진노하셨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 하나님은 그들이 당하는 말 못할
수고와 고통을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악한 모습은 오늘을
사는 신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심령 속에 하나님 나가가 세워지고 여호와를 신으로 받는 자들이지만, 그 속에는 일곱 족속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과 타협하고, 그들의 종이 되기도 하고, 그들과 싸우기도 한다. 넘어지기도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영적인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에는 육적인 자아와 영적인 자아가 죽을 때까지 공존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지혜로 분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그들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싸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앞장서서 싸우시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아비멜렉 이후에 나타나는 소사사들을 보면 활동은 상세하게 나오지 않고, 이름이 등장하고 사사기 된지 몇 년 만에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라는 말이다 나온다. 장사되는 것은 새창조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첫사람
아담과 함께 세상에 온 자들이 다시 마지막 사람 아담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는 장사되는 것이다.
⑧입다
사사기 11장을 보면,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할 때,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우고 승리하여 돌아오면 가장 먼저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린다고 서원을 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는
믿음의 조상을 소개하는 곳에 등장한다.『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입다가 서원한 것이 정말 인신제사였는가.
아니면 성전에서 평생 사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봉사하는 역할로 해석해야 하는가 또는 다른 시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입다는 길르앗과 기생(창녀)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였다. 그런데, 지역유지나 형제들로부터 쫒겨나 돕 땅으로
갔는데, 잡류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입다가 그들의 용사가 되는 것이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찾아와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자기들이 쫒아낸 창녀의 아들 입다를
찾아와 머리를 숙이니 정말 상황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장관은 지휘관 역할이다. 그런데, 입다가 이전에 자기를 쫒아낸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이는 사사기 10장 6-9절의 내용과 같은
의미다.『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야짜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할 때마다 우상을 섬기는 그 나라의 압제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오늘날에도
인본주의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때 그 우상으로부터 고통당하는 것이다. 돈을 신으로 하면 돈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것이다. “곤고” 라고 한 야짜르는 흙으로 빗다라는 의미다. 흙은
갇혀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사사기 11장 10-14절에서 하나님께서 일곱
족속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낸 사실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므로 그 우상에게 가서 구해달라고 해보라는 것이다. 10장 15절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겠다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래서 먼저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상들을 철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은
진절머리나는 이스라엘의 행동을 보고도 그들을 결국 구해주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지만, 결국 우상으로 인해 적들이 쳐들어오므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이는 입다를 쫒아냈지만, 결국 입다에게
찾아와 사정을 하는 모습과 거의 유사한 것이다. 입다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것이다.
사사기 11장 11절에서『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그리고 입다는 암몬과 협상을 시도한다. 입다는
하나님과 그모스(암몬의 신)을 대비하면서 말을 한다. 너희 신인 그모스가 이기면 땅을 너희들이 차지하게 되겠지만, 하나님이
우상을 쫒아내시면, 그것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기 11장 29-30절에서『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라고 서원하는 내용이다. 입다가 가장 먼저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했는데 자기 딸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드리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무남독녀나
이삭과 같이 독자라는 말이 상통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고서는 아브라함이 실제
이삭을 칼로 죽이려 할 때 말렸다는 사실이다.
고대근동 지방에서 싸움은 신들과의 전쟁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과 그모스를 믿는 암몬과의
싸움인 것이다. 입다가 전쟁을 숭리하면 인신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열왕기하 3장 26-27절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여기도
그모스 우상에게 번제를 바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출애굽 당시 모세가 시내산으로
갔을 때 백성들은 아론을 부치겨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라고 제사를 드린 적이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본적도 없었다. 다만 모세로부터 전해듣고, 여러가지
이적을 나타내어서 믿고 있을 뿐 그들의 믿음에 있어서 정체성은 자기들을 위한 여호와인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사사 입다에게 있어서 백성들은 여호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몰렉 제사를 하는 그모스를 여호와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입다 역시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그렇게 생각하고 믿은 것으로 추론된다. 전쟁에 이기게 해주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다. 오늘날 인본주의 신앙에서
나에게 어떻게 해주면, 보답을 하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신을
이용하는 전쟁인 것이다. 이게 인신제사의 본질이다.
사사기 11장 29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는데, 그가 인신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 맞는가 라는 것이다. 입다는 여호와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모스를 믿고 있는 것이다. 성경(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선진의 대열에 들어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우상숭배의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우상을 섬겼는데, 다시
적이 쳐들어 오므로 이기게 해달라고 매달리는데, 결국 우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전쟁에만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 문제만 해결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믿는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입다의 딸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다. 사사기 11장 40절에서『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우상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입다는 딸이 인신제사를 통해서 죽는 것을 보면서, 한 순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딸이 죽는 것을 바라보고, 자시도
그와 함께 죽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우상이 잘못된 것임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딸은 입다에게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가 바로 믿음의 선진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입다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리고
전쟁에 나갔지만, 자신이 믿는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도 모르고 인신제사를 드린 것이다. 오늘날 마치 성령이 임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대변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온갖 악행을 신도들에게 행하는 모습을 본다. 입다 라는 사사는
하나님이 세운 사사가 아니라 길르앗 장로들과 백성들이 세운 사사였던 것이다. 앞에 아비멜렉과 같은 이치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영을 이용해서 자신의 무엇을 이용하려는 모습이다.
갓지파 소속이자
길르앗 사람 입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몬 자손의 위협과 도발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켰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이내 평온의 시기로 진입하지 못하고 또 다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입다가 이방 암몬
사람들의 위협과는 달리 동족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하나인 에브라임 사람들로부터『너와 네 집을 불사르겠다』는
위협을 받고 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위협의 이유는 입다가 암몬 사람과 싸우러 갈 때에 자신들을 불러
함께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주장하지만 그것은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으며 억지 주장이었다. 그래서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말한다.『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입다의 주장은 암몬
자손과 싸울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렀다는 것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히려 어떤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입다의 주장이다.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열세를 안고 암몬 사람들과
싸웠다고 말한다.
또한 그 싸움에서
승리는 자신이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에 가능하였음을 강조함으로 승패의 원인이 사람의 수와는 무관함을 알리고
있다. 입다는 자신의 이름 내려고 암몬 사람과 싸우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웠다. 입다는 믿음의 행동을 하였다.
히브리서 11장 32절을 보면 입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입다는 히브리서
11장 33-34절에서, 믿음으로
나라를 이긴 사람이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비천한 출신으로 여겨졌던 입다는 신분상승을 위하여 쉽게 빠질 수도 있었던 자신의 이름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비록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 위협을 가하였더라도 과거 기드온과의 시비 때처럼 당하는 처지에서 좋게 말로써 그들을 진정시켰다면 유혈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가 지나치게 입다를 포함해서 길르앗 사람들의 가장 취약한 점을 건드렸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의 유혈 사태 원인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 말은『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였다. 이는
길르앗 사람들의 정체성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길르앗은 지역적으로 대략 위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아래로는
사해까지 뻗은 요단강 줄기 동편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소속이 불분명한 도망자로 말했기 때문이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이로 인해 유혈 사태가 일어나 큰 인명 피해가 나고 말았다.
12장에는 입다 외에 사사 3명이 더 등장한다. 그 중에
사사 압돈은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라돈은 에브라임에 속한 한 성읍이었다. 사사
압돈은 에브라임 사람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과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에브라임
사람들 중에 사사 압돈이 나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였다.
⑨삼손
나실인(나지르)인 삼손과 나사렛 예수와는 상당한 연관이 있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
이야기는 다윗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사사시대는 우상숭배와 그로 인한 이민족의 침략, 그리고 이스라엘의 울부짖음과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율부짖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드온 40년 동안만 평온했다고 말을 한다. 기드온 이후 아비멜렉과 입다를
거치면서 평화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사사기 13장 1절에는 평화도 없는데,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침략과 지배 속에서 그것을 평화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블레셋족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적 생활과 중계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다.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블레셋 치하에서 삼손이 사사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0년 밖에 안 되며 삼손 이후에도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그러나 사무엘의 통치 말엽 경에 블레셋의 압제가 일시 소강 상태를 이루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까지의 기간을 대략40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도 블레셋은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다윗 왕이 저들을 정복하므로서 마침내 블레셋의 압제는 끝이 난다. 사사시대는 다윗의
시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솔로몬 시대 이후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을 때, 북쪽을 관장하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 하나는 단에다 두었다. 단은 우상의
성지라고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파에서 마노아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마노아는 노아를 연상한다. 그 의미는 안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노의 홍수의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영적인 존재)과 사람의 딸들(육적인 존재)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결혼했다는 말은 영이 육체 속에 갇힌 흙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생의
몸이 죽어야 할 흙의 몸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죽어야 할 존재를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로 설명하신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물로 심판하며(물세례),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를 통해서 구원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안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있지 못하다 라는 의미다.
마노아의 아내는 불임이었으나,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셨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도 결혼 전이라 불임과 같은 상태였지만,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하게 하셨다. 불임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상태를 나타낸다. 아들을 낳아야만
대를 이어간다. 그런데, 불임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 마노아의 아내에서 삼손, 마리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삼손은 빛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예수님도
로마지배의 영적 암흑시대에 빛이 되신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믿음의 선진들에게 아들에 대한 수태고지는 마노아의
아내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무엘의 모친
한나, 세례요한의 모친 엘리사벳,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로
이어진다.
누가복음 1장 31절에서『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오늘날 교회는 원래 임신할 수 없었던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만 하나가 된다. 창세기 2장 24절이나, 에베소서 5장
31-32절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교회는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의미한다. 성도(여자)는 그리스도(남자)를 만나므로,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통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다.
그게 복음이고 구원이 된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아들을 낳는 장면이 나오는데, 용(사탄)이 여인의 출산을 방해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 들어가고, 그리스도 역시 재림하여 심령
속의 성전으로 들어오면 둘이 만나게 된다.
이사야 54장 1절에서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기의 답은 54장 4-5절에서『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하나님은 블레셋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영적 불임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불임상태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듯이 아들 역시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은 영적 구원의 증표인 것이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나실인 (나지르נְזִ֧יר)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포도주를 마시면 안되고,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되고 시체를 접촉하면
안되는 규례였다. 포도주와 관련하여, 나지르는 포도나무와
관련이 있다. 어느 기간에는 포도나무에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레위기 25장 5절에서『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나지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포도주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시편104편 15절에서 말을 한다.
신명기 14장 26절에서도『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장막절에는 포도주를 마셔도 좋다는 말이다. 장막은 안식을 의미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장막에 거하고 포도주에 취했다는 말은 안식을 의미한다. 안식하는
자는 포도주를 마실 수 있지만, 안식하지 못하는 자는 포도주를 마시면 안되는 것이다. 성만찬 때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는 성도가 안식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자가 성만찬에 참여하지만, 안식하지 못한 자는 성만찬에 참여하면 안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29절에서『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밤 성만찬에서 세번의 포도주를 마신 후에 네번째 포도주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제
유월절 포도주를 대신할 새 포도주를 마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런 장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실인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전의 포도주는 고난의 포도주이지만, 새
포도주는 기쁨의 포도주인 것이다. 잔치의 포도주인 것이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그 포도주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신랑을 빼앗길 때는 금식을 하라고 하셨지만, 신랑과 혼인잔치에 들어가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포도주는 안식의 표현이다. 안식하지 못한 자는 금식을 하지만, 안식한 자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안식이
없다는 표현이며,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은 너희들은 영적으로 안식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나지르(나실인)는 나자르(나사렛)와 거의 비슷한 발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죄악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넘기시며, 죄악에 대한 심판을 허락하셨다. 이 내용이
본문에 단 한 절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 안에는 이스라엘의 눈물의 역사가 흘렀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눈물의 역사, 그리고 눈물의 인생이 본문의 첫 출발점이다.
사사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본문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사사들이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구하며 부르짖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돌아볼 여력이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못할만큼 영적으로 악화된 상황임을 의미한다. 이방의 압제가 너무도 당연하게 이스라엘에게
뿌리깊게 박힌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구원할 하나님도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암담한 상황 속에 있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은 약속과 소망이 없는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 여인에게 반응한다. 여자는 남자(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언어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이를 태어나게 해 주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육신의 남편인 마노아는 제외시키고, 계속 마노아의 아내인 여인에
대해서만 언급되는 것이다. 육신의 남자 없이 태어난 아들을 약속의 자녀라고 말을 한다. 성도 역시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구원의 법칙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부르짖기도 전에 구원을 시작하신다.
태어날 아이로 인해 구원이 완성되지는 못하더라도 구원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언만으로도 이스라엘에게는 복음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할 한 아이 삼손은 나실인으로 세워진다.
나실인은 민수기 6장 1~8절에 잘 나타나있듯이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다.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자기 몸을 거룩하게 구별해야할 사람이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한다는 것은 세상의 향락과 기쁨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한다는 의미이다. 포도주에
취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는 표현이다.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것 역시 머리이다. 머리카락은 일종의 면류관이다. 창세기 49장 26절에서『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나찌르)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나찌르는 나실인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복을 나실인(요셉)의 정수리에 내린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 10-12절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제사장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이다. 레위기 21장 10절에서『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네쩨르)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은 일정 기간 서원을 한 때였다.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제사장은 세상에 살고있는 자를 대표하며, 여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남자를 만나기 전의 여자인 것이다.
시체를 가까지 하지 않는 것은 죄와 부정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다. 나실인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삼손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았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내에게 전한 예언을 들은 마노아는 아내와 함께 있을 때 다시
한 번 예언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다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를 본 마노아는 그 사자를 극진히 대접하며
이름을 묻게 된다. 마노아에게 들려준 이름 기묘, 이 이름은
장차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삼손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13장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휘저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삼손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고 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이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나실인은 포도주를 마시면 안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시체를 만지면 안되었는데, 삼손은 이 세가지를
모두 어겼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삼손도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고 나실인이였지만, 규례를 어겼던 것은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 사사인 삼손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된다. 삼손은 블레셋의 딤나라는 마을로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삼손에 대한 성경의 첫 이야기는 그가 블레셋 여인을 보았다는 말로 시작이 된다. 삼손은 부모님에게 자기가 딤나에서 본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삼손의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웠기에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그런 잘못된 선택이라 할지라도, 즉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좋아하는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해서 사용하셨다.
삼손은 자기가 좋아하는 블레셋 여인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자 함께 블레셋 땅 딤나로 내려가게
되었다. 내려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으로 내려와 여자(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를 데리고 아버지께로 올라오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내려와 신부를 데려 오는 것을 의미한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도와 혼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세가지의 규례를 모두 어긴 것이다. 저주에 해당된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부정한 여인인 블레셋 사람과 결혼을 묵인
한 것은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가 성도와 혼인하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딤나에 도착한 삼손은 나실인이었기에 포도주나 포도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되는데
포도원에 들어가다가 젊은 사자를 만났다. 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한 것인가? 그것은 앞으로 삼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미리보기였다. 빈손으로
젊은 사자를 죽이는 사건은 훗날 블레셋을 쳐 부수는 사건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삼손은 사자를 죽이는
힘이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신다는 것을 바르게 깨달아야 하는 사건이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을 보려고 딤나에 다시 내려가다가 예전에 죽인 사자가 생각나서 다시 포도원에
들어갔는데 그 사자의 시체에 벌 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죽은 사자의 몸 속에
있는 꿀을 손으로 떠서 먹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도 드렸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포도원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아야 하고 죽은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삼손은 또 나실인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점점 나실인으로 바른 모습을 잃어가는 삼손이다. 그런데 삼손의 잘못된
모습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하여 결혼식 피로연 잔치를 열게 된다. 그런데 결혼식 잔치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술이다. 삼손을 나실인이었기
때문에 술을 입에 대면 안 되었다. 그런데 삼손은 칠일 동안 잔치를 베풀고 술 기운에 흥이 나서 수수께끼를
내며 옷 60벌 내기를 한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삼십명)은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 세상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다. 밭을 갈듯이 묵상하므로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그리스도)의 아내(성도)를 통하여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로부터 사자와 꿀에 대한 힌트를 얻게되고, 그것을 삼손에게 말했다.『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비록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말을 했지만, 이 글의 저자인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통해서 독자인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사자는 블레셋을 상징한다. 삼손이 사자를 죽이는 것은 블레셋을 친다는 의미다. 그래서 꿀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곧 삼손이 블레셋을 치는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친다는 말이다.
블레세 사람들이 삼손에게 수수께끼를 답한 것의 의미는『너희들이 우리를 칠거야 그래서 이스라엘이
꿀이 될거야』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말을 했다. 가나안은 일곱 족속을 쳐서 죽인 결과 꿀(이스라엘)이 나온다는 것이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삼손의
수수께끼 장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은 오히려 이 실패를 블레셋 사람을 치시려는 빌미로 사용하셨다. 이 내용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블레셋)에 대한 죽음이고, 부활은
이스라엘의 회복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의 임금인 사탄(사자)을 심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삼손은 블레셋의 아스글론이라는 도시로 내려가서 삼십 명을 쳐 죽인 후에
옷을 빼앗아 딤나로 와서 수수께끼를 맞춘 사람들에게 주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받은 옷은 죽은 자기 동족들이
입은 옷들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죽은 자의 옷을 입는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은 자의 옷(혼)을 입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삼십에서 삼은 죽음(심판)을
상징한다. 죽은 자의 옷을 입는 자는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삼손은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고향 집으로 가 버리자, 삼손의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결혼식 때 들러리로 온 블레셋 친구에게 아내로 주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치는 또 다른 빌미를 주는 것이 된다.
삼손은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통해 역사하셨다. 삼손의 실패를 오히려
블레셋 사람을 치시려는 빌미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었던 못 풀었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사실 삼손은 그저 자기 눈에 좋게
보였던 블레셋 여인과 결혼해서 즐기며 살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삼손을 그냥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게 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만드셨다. 삼손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삼손은 자신의 결혼식에 동석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한가지 수수께끼를 내었고 답을 못 찾던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위협, 결국 답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그에 따라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약속한대로 모시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아스글론 주민들로부터 노략하여
주게 된다. 이 상황에 몹시 화가 난 삼손은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의 아내는 삼손의 결혼식 들러리로 왔던 삼손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본문은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에 전개된 상황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삼손은 밀 수확철에 새끼
염소 한마리를 가지고 아내에게 찾아가 장인에게 아내의 침실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미
삼손의 친구에게 딸을 주었던 장인에 의해 그의 요청은 거절된다. 중요한 점은 아내를 내팽겨쳤던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아내를 아니 아내의 침실을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밀 수확철은 오순절과
연관된다.
성령의 불이 임하는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죄를 발견하게 하고, 어떤 이는 의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삼백마리의
여우 이야기는 블레셋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다.
장인에 의해 아내의 침실 입실이 거부된
삼손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기 과시를 위해 수수께끼를 내었던 자신으로 인해 촉발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원인을 자신과 장인이 아닌 블레셋 사람에게 찾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여우들을
이용해 블레셋 사람의 곡식 뿐만 아니라 포도원, 그리고 올리브 농원까지 모두 다 태워버린 것이다.
여우 삼백마리에서 삼백은 기드온의 삼백 용사에서 등장한다. 이때도
횃불(라피드)이 등장한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이 우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우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육적인 자아가 우상인 것이다. 삼이라는 숫자는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육적인 자아가 죽고, 영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적 자아가 형상되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게되면, 결국
사자 같은 우상을 버리고, 꿀같이 단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블레셋은 겉으로는 수수께끼의 답을 알았지만, 이면적인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한 것이다. 블레셋은 사탄과 하나가 된 자들이다. 이스라엘을
불레셋으로부터 구원은 삼손을 도구로 불로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다.
삼손으로 인해 한때 그의 아내였던 한 여인과
그의 장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처참하게 불에 태워져 죽음을 맞게 된다.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전 아내와
전 장인을 잃게 된 삼손은 멈춤없이 복수의 칼을 뽑는다.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쳐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유다 땅 레히 지방을 짓밟게 된다. 결국 삼손의 처, 장인, 블레셋은
모두 블레셋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원인 파악에 나선 유다 사람들은 그 상황이
삼손으로 인해 야기된 것임을 알게 되고 밧줄로 묶은 체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기로 삼손과 합의한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대면하기 위해 나왔고 그 때 주님의 영이 그에게 임함과 동시에 그를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져 나가면서 마침
옆에 있던 당나귀 턱 뼈로 블레셋 사람을 천 명이나 쳐 죽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전체적인 내용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도 그들에게 순응하여 사는 모습인데, 삼손이라는 사사가 나타나서 불레셋을
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다지파는 그들의 사사인 삼손을 불레셋에 넘겨주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결박하여 로마에 넘겨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영적인 간음의 모습을 삼손이라는 사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고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과 우상을 겸히 섬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블레셋을
심판한다는 내용이다.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수수께끼의 비밀은 바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즉 그리스도(남자)와 교회(여자)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만 하는데, 다른 남자를 찾아가면 그게 영적 간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수수께끼를
깨닫지 못하면, 심판이 되는 것이다. 불타는 여우 삼백마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는 자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나귀뼈가 사자(블레셋)보다
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자로부터 단 꿀이 나오는 것이다.
꿀은 그리스도 곧 나귀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라맛 레히는 턱의 산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나귀의 턱뼈를 던져 떨어진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다. 라맛은 신약에서 골고다(해골의 언덕)라는 의미다. 레히는 시체 더미이다.
사자가 죽어서 시체가 더미가 되면, 단 꿀(부활)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가 블레셋이며, 구원에서 멀어진 자들이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때에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냈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늘 함께 했다. 한 번은 딤나의 포도원에서 젊은 사자를 만나서 사자와 싸울 때는 염소새끼를 찢어 죽이듯 했고, 이스라엘의 대적인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와 마주할 때도 짐승 턱뼈 하나를 주워가지고 한 더미, 두 더미에 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여 쌓아 놓고 블레셋 사람들을 떨게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힘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어서 그를 잡을 방도를 생각하다가 삼손이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통해 힘의 원천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알아내고자 꾀를 짜내었다.
삼손은 블레셋 딤나 지역의 여자와 결혼을 했다가 실패하고,
들릴라를 만나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으려고
들릴라를 찾아와 삼손의 힘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아내어 그 힘을 빼앗을 방도를 알아내 주면 다섯 사람이 각각 은 일 천 일 백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고 그 방도를 알아내도록 했다. 삼손은 들릴라를 만나 여인의 꾀에 빠져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다. 들릴라는 수 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삼손에게서 그 비밀을 알아내었고,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한 후, 사람을 불러 머리카락을 자르게하고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 힘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블레셋과 들릴라의 꾀에 넘어간 삼손은 힘을 잃게 되었다.
들릴라의 이름 뜻은 밤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작은 태양, 한 줄기 빛 인데, 밤의 여인을 만남으로 빛을 잃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다.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을 깎이운 삼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도 더 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위기에 처한 삼손은 예전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해진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으로 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과 회한 가운데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케 만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니께 드려진 자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여인인 들릴라에게 바쳐진
자가 되었다. 여자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을 떠난 죄인(여자)를 위해 죽는 모습이다.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와 관련 예수님께서는"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고
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삼손은 힘을 잃고 블레셋에게 잡혀 눈이 빠졌다. 눈이 빠졌다는 것은 앞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할 때 앞이 보이지 않는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삼손은 놋줄로 묶임을 당했다. 이것은 세상의 죄악된 줄에 묶여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손은 눈이 멀고 놋줄에 묶여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영광스러운 사람 삼손은 이방인 블레셋 사람들의 웃음거리,
멸시와 노리개 감이 되었다. 이전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 다곤에게 축복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삼손의 실패는 하나님을 찾지 않은데 있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바로 삼손을 망친 가장 큰 죄였다. 이제 삼손이 기도하게 되었다. 삼손은
죽음을 각오했다.『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는 목숨을 건 기도였다. 여기에 삼손의 위대한 승리가 있었던 것이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삼손이 그들의 디곤 신전을 무너뜨린 것이다. 삼손은 불레셋과 함께 죽었다. 우리에게 블레셋은
심령 속의 일곱 족속과도 같은 자들인 것이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곧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삼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⑩미가
사사시대는 약 340년간 12명의 사사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사사가 왕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다스린 것은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온갖 우상숭배를 일삼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자도, 그 말씀을 들으며 순종하던 자들도 많지 않고 무정부 시대와 같았다.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다 라는 표현으로 설명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는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도 자기 소견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믿고 세상의 우상도 섬긴다면 더욱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사기의 내용을 구분해 본다면 가나안 정복과정을 요약한 내용과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해 3장 6절까지의 내용은 서론에 해당이 된다. 그리고 3장의 웃니엘부터 12장의
삼손까지 12명의 사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본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서 17장 이후의 내용은 사사기에 부록과 같이 붙어 있는 부분이다.
17장은 미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가 살던 시기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사사가 아닌 미가의 이야기가
17장과 18장에 걸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경이
이처럼 미가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혼란스러웠는지를 강조하여 말하기 위함이었다. 미가는 예루살렘 북쪽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상당히 많은 가치를 지녔던 은 1,100세겔을 잃어버리게 되자 자신의 재산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한다. 그녀가 1,100세겔이라는 엄천난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16장에서 드릴라가 은 1,100을 받고 삼손(그리스도 예표)를 판 것과 같은 것이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팔아넘긴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돈에 손을 댄 것은 바로 그 아들 미가였다. 미가는
어머니의 저주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어머니에게 돌려드렸고, 어머니는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은 200세겔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다.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저주의 덫에서 풀어내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 자신의 믿음의 열심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했던 이들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며 부패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2계명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아들 미가는 하나님을 위해 신당을 만들어 그 안에 온갖 신상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우선 제사장으로 세웠다. 성경은 이러한 당시
사회 모습을 한줄로 잘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사사기 17장 6절에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한 사람이 더 등장하면서 당시 사회가 총체적으로 얼마나 부패해 있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미가는 신당 안에 각종 신상을 채워 넣은 뒤 이제 제사장까지 있으면 구색이 맞겠다 싶어서
제사장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한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다. 레위인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의 땅을 별도로 분배받지 않고 도피성 6개를 포함하여 다른 지파들의 땅에
총 48개의 성읍을 거주지로 분배 받았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무질서 하였고, 원래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도록 하였지만 이것 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본래 살도록 한 성읍을 떠나 다른 성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 청년도 원래는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지만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찾다가 결국 에브라임 산지까지 오게 되었다.
이 레위 사람을 청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제사장은 30세 이상 된 자만이 가능하였지만 그는 아직 나이가 안되었기에 청년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혼탁한 사회에서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레위인 제사장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미가는 이 청년이 정상적인 제사장이 되기에는 부족하였지만 레위인인데다가 자기
아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아들을 대신하여 이 레위 청년으로 하여금 자기 집에서 제사장으로 있어줄 것을 제안하였다. 나이 30세도 안된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에게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미가의 이러한 행동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제사장을 세우고 있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은 결국 아들 미가를 위해 신상을 만든
것이었고, 그 아들 미가는 만들어진 신상을 신당에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 신당을 지킬 제사장을 선발 하였는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는데 그것에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라고 말한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든, 무슨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형상도 만들고, 그 형상을 놓을 신당과 그 신당을 관리할 제사장까지 세웠다. 자신이
열심을 다해 완벽하게 준비해 놓은 제단 위에 하나님께서 복이라는 불로 그 제물을 태우시기만 하면 하나님도 좋고 자신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이런 미가의 의도는 나중에 단 자손들에게 자신의
우상과 레위 청년을 모두 빼앗기게 될 때 자기 마음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미가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자기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비단 미가에게만 있었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미가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데 크게 일조한
한 사람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는 바로 미가의 잘못된 행동에 맞장구 쳐준 레위 청년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정착하기 위해 내려온 이 레위 청년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미가의 말은 참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은 아니었지만 레위 청년은 미가의 아들처럼 대우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가는 레위 청년을 아버지처럼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요청을 하였지만 제사장으로 고용되어 미가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 레위 청년은 결국 미가의 아들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레위
청년은 생활에 있어서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사사시대 미가라는 한 사람의 종교적 타락은 당시 많은 백성들의 종교적 타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가의 모습이 사사시대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일을 하면서 나름 열심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그로 인해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할 때가 많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잘못된 열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망하시고, 그
행위를 심판하신다.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제사장으로 하여금 실로에 나아가 예배드리도록 하였지만, 미가는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열심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자기 생각과 소견대로 살아가며,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사시대의 무지한 백성이나 이러한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분명히 지적하기
보다 오히려 맞장구 치며 자신의 욕심과 이익의 기회만을 살피는 악한 지도자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목사들도 많다.
교회 건물은 단지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불과한 것이다. 성전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을 하면서 성전 건축 헌금을
내도록 유도하거나, 신도들의 보증으로 은행에서 엄청난 돈을 빌려 교회 건물을 확장하고 치장하는 것이다. 미가시대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교회가 돈이 많아지면, 결국 주식회사처럼 자식에게 물려주기도 한다. 자기 소견대로 말을
하는 교회는 그 교회에 왕이 없다는 말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들의 교회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교회인 것이다.
⑪레위인
사사기
18장에는 17장의 등장인물인 미가와 레위인에 더하여 한 무리가 새롭게 등장하여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바로 단 지파다. 단 지파는 원래 그들의
몫으로 분배된 땅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정복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 지파는 그러질 못했다. 사사기 1장 34절에 보면, 오히려
그 땅 거주민인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난 신세가 되어 버렸다.『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였음이라』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다. 그렇게 되자 단 지파는 그들이 살 땅을 찾으러 다닐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단 지파는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찾기 위해 그들 가운에 용감한 다섯 명을 선발해서 땅을 탐지하고 살피도록
했다. 그 정탐꾼들은 에브라임 산간지방을 돌아보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베들레헴 출신 레위인을 만났다. 그리고 몇 가지를 물었다.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정탐꾼들은 한 가지 요청을 했다. 그것은 『우리의 앞날이 형통할지 즉 거주할 땅을 잘 찾을 수 있을 지 하나님께 물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위인은 『주님이 그 길을 인도하실 것이니 평안히 가라』라는 근거 없는 말로 그 정탐꾼들을 안도하게
했다. 그 레위인은 바른 제사장이 아니었다. 미가의 유익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고용된 거짓된 제사장에 불과했다.
정탐꾼들은 그 말을 듣고 길을 떠나 라이스란
성읍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성읍을 살펴보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땅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정복하기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땅을 자신들의 손에 넘겨 주셨다는 말로 자신들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합리화시켰다.
이 보고를 들은 단 지파는 정예 병력 육백 명을 구성하여 라이스로 보냈다. 라이스로 가는
도중 그들은 미가의 집에 들러서 레위인 제사장이 생계유지를 위해 사용해 오던 목상, 에봇, 드라빔과 신상 등의 우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레위인이
항의를 해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때 레위인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같이 가자는 것이다. 한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을 들은 레위인 제사장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처럼 오히려 그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더
큰 명성과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떤 방법이든 관계치 않아 하는 그 레위인의 부패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잘 엿볼 수 있다.
단 지파 군사들은 여러 우상과 레위인 제사장을
데리고 갔을 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약탈해 가기까지 했다. 이를 알게 된 미가는
이웃집 사람들과 함께 단 지파 군사들을 뒤쫓아 갔지만 결국 힘의 논리 앞에 무기력하게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단 지파 군사는 그 길로 라이스로 향해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죽이고 그 성을 차지해 버렸다. 이는
그들에게 원래 주어졌던 성읍은 포기한 채 인본적인 욕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자들을 참혹하게 죽이는 야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단 지파의 행동과 또 레위인 제사장의 행동은 그 시대 타락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 18장 21절에서『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하나님 나라가 있는 곳은 샬롬이지만, 단 지파는 자기들이 만든 신상이므로 샬롬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이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로 물든 교회들은 왕이 없는 곳이다. 그들에게 여호와가 없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샬롬이 없는 것이다.
19장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악이 만연한지를 어떤 레위인의 타락을 통해 보여주며, 그로 인해 열두지파가 큰 위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아래에 살아가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시기를 가리킨다.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이 표현은 레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이들이다. 그로
인해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특별히, 결혼생활에 있어서 엄격한 규정들이 적용되었다. 레위기 21장에 따르면,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할 수 없었다. 더 끔직한 사실은 행음까지 한 첩이 집으로 돌아가자, 4개월이 지난 뒤 찾으러 갔다는 사실이다.
레위인은 그의 장인에 집에 머물며 먹고 유숙하며 5일을 보낸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인은 그 레위인으로 하여금 더 머물기를 계속 권한다. 정식 결혼식을 하는 것처럼 일주일을 채우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딸이 돌아가면, 율법대로 처벌될까봐 불안해서 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다섯째 날이 되자 장인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에브라임으로 떠난다.
예루살렘에 첩과 함께 간 레위인은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인 여부스 사람의 집이 아닌 기브아로 가 유숙하고자 한다. 결국 기브아에 도착한 그들은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류하는 한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 노인은 기브아에서 동향사람을 만나서인지, 레위인 일행을 환대한다. 즐겁게 저녁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긴다.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와 동일한 장면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은 영적 간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의 소견대로 믿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집주인인 그 노인은 소돔과 고모라의 롯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 자신의 처녀인 딸이든 이 레위사람의
첩이든 데리고 가서 행음하라고 넘기려고 한다. 그러자 베냐민의 젊은 남자들은 레위인의 첩을 붙잡아 밤새
능욕했다. 결국 그 레위인의 첩은 집 문 앞에 엎드려진 채 버려진다.
결국, 레위인이 불러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문지방에 손만 올려두고 시체로 변해 버렸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그 시체와 같이 죽어있는 모습이다.
너무나도 끔찍한 밤을 보낸 레위인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첩을 열두덩이로 나누고, 한 덩이씩 이스라엘 온 지파에 보냈다. 온 지파가 영적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열두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을 온전케 세우시기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분리되고, 타락하고, 패역한 백성이 된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악이 이스라엘 온 전역에 팽배해지자, 가나안인의
풍습을 쫓아 첩을 두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살아가던 레위인이 능욕당한 자신의 첩을 열두개의
토막으로 내어 보낸 사건으로 인해 열두지파 중 한 지파가 거의 몰살당할 뻔한 상황까지 몰고 갈 뻔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파멸을 보여준다.
바로 야곱이 그토록 아끼던 베냐민 지파였지만, 그의 후손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닮은 패역한 인생들이 되어 버렸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 끔찍한 시대를 성경은 가장 부패한 시대인, 기브아의 시대라고 칭한다. 이러한 영적 파멸은 오늘날에도 상존한다. 교회에서 진리를 말하면, 이단시하고 오히려 비진리를 진리인양 받아드리는
것이다.
20장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여호와 앞에 모였는데,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경위를 듣는다.
19장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레위인은 그의 장인에 집에 머물며 먹고 유숙하며 5일을 보냈는데, 장인은 그 레위인으로 하여금 더 머물기를 계속 권한다. 다섯째 날이 되자 장인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에브라임으로
떠난다. 예루살렘에
첩과 함께 간 레위인은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인 여부스 사람의 집이 아닌 기브아로 가 유숙하고자 한다.
결국 기브아에 도착한 그들은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류하는 한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 노인은 기브아에서 동향사람을 만나서인지, 레위인 일행을 환대한다. 즐겁게 저녁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긴다.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브라임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집주인인
그 노인은 소돔과 고모라의 롯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 소돔성에 천사가 찾아오는데, 그 천사를 관계하려고 소돔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면과 유사하다. 기브아
사람들이 이 레위인을 관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레위인은 천사와 관계있는 자인가?
그런데, 노인이 자신의 처녀인 딸이든 이 레위사람의 첩이든 데리고 가서 행음하라고 넘기려고 했다. 그러자 베냐민의 젊은 남자들은 레위인의 첩을 붙잡아 밤새 능욕했다. 결국
그 레위인의 첩은 집 문 앞에 엎드려진 채 버려진다. 결국, 레위인이
불러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문지방에 손만 올려두고 쓰러져 버렸다.
너무나도 끔찍한 밤을 보낸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 열두덩이로 나누고, 한
덩이씩 이스라엘 온 지파에 보냈다. 레위인이 그의 첩을 열두덩이로 쪼개기 전까지는 시체라는 말이 없다. 여전히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열두덩이를 나누다
라는 말이 각을 뜨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제사 용어인데, 살아있는
자를 희생제사에 사용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레위인은 이 인신제사를 한 여인을 열두덩이를 각 지파에게
보내는데, 열두지파 사람들은 충격을 받게 된다.
각을 뜬다는 것은 제사 용어인데, 레위인의 첩이 여전히 죽지 않고 거의 죽음 상태에 있는 것을 열두 덩이로 각을 떠서 인신제사를 드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각을 떤 덩어리를 열 두 지파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어지러운 상태인지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부패함의 중심에는 레위인에게
있었다. 그런데, 레위인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감추고 잘못을
기브아 사람들에게 돌리며,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것이다. 이같이
각을 떠서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레위인은 첩을 열두 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시체를 열두 등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분열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시체를 각 지파에 보낸 것은 모든 지파가 이렇게 영적 간음으로 썩어가고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39-40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소돔과 고모라에서 천사는 롯과 그의 딸들을
구하는 내용이지만, 사사기의 레위인은 마치 천사의 역할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을 파멸로 몰고 가는 역할을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벨리알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브아 사건은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레위인의 첩, 살해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들썩이게 했고, 각 지파에서 무려 40만 명의 보병을 포함 많은 이들이 모였다. 분노한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듣기를 원했고, 사건의 당사자 레위인은
입을 연다.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목숨을 위협했고, 결국 첩을 능욕하여 살해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말은 표면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자기중심적으로 편집되었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첩을 불량배들에게 직접 넘겨주었고, 집단 강간
중에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아침 일찍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달아나던 자신의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이 사건이 자신에게서 비롯하지만, 자기반성과 고백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타인의 문제로 몰아간다. 영적으로 보면, 각을 떴다는 말에서 레위인은 첩을 열두 조각을 낸 뒤에 인신제사를 하고 그것을 열두 지파에게 보낸 것이다. 기브아 사람들이 음행하고 망령된 일을 행했다고 고발하고 있으나, 정작
레위인 자신이 음행하고 망령된 일을 행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고 있다.
한 레위인의 그릇된 자기객관화는 온 민족을
전쟁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기폭제가 되었다. 레위인의 상황설명에 격양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던 이스라엘은
사실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거대 무리가 된 이들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각처에서 모인 40만 명의 보병은 망령된 일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심판을 맡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여든 무리는 심판자를 자처한다.
선동당한 이스라엘 군대 40만 명은 베냐민과 기브온 연합군, 2만 6천 700명과 전투를 준비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뜻을 구하지 않던 이들은 병력으로 압도하는 상황에서, 어떤 지파가 선봉에
서야 할지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명분을 찾는 것이다.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승리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압도하는 군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연합군은 전투에서
2만 2천 명을 잃는다. 병력의 5.5%를 잃고, 그들의 행동을 통해 숨겨둔 중심을 볼 수 있다. 전장에 나온 베냐민과 기브아 역시 자신의 소견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국토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전쟁터로 변했다.
40만 대군은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에 임하지만, 곧 1만 8천 명의 군사를 잃고, 이스라엘
연합군은 혼란 상태에 빠진다. 압도하는 병력을 믿었지만 패색이 짙자,
이들은 전장에서 보기 드문 행동을 한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금식하며 제사했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이미 두 번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누가 올라가서 싸우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을 드렸다. 그런데 연이은 패배 후, 질문이
바뀌었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합니까? 아니면
싸움을 그쳐야 합니까?』이들의 질문이, 아니 이들의 기도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세번째의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다. 세번째의 전쟁은 여호와가 앞에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한 전쟁 결과, 베냐민과 기브아 주민은 참담하게 패한다. 전세가
기울었고 전의가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연합군이 도를 지나친 행동을 했다.
신명기 13장 13-16절에서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여기서 불량배들이 레위인을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하는 것이다.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진멸하는 것이다.
2만 6천 명의 베냐민 군사 중 600명만 목숨을 부지하여 광야로 달아났다. 전의가 상실될 뿐 아니라, 지파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의 성읍을 초토화하고, 동물과 사람들마저
학살했다.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백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긍휼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 색출해 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같이 베냐민 거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베냐민 각 성읍이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에 곱하여 몇 배로 거둔
셈이 되었다.
사사기는 기브아에서 시작하여 베냐민 지파로 종결된다. 그것은
다윗과 연결되어 있다. 다윗은 곧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기브아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고향이다. 사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이 뽑은 왕이었다. 라마에서 활동한 사무엘이 등장하고 사무엘은 다윗 왕을 세운다. 다윗
왕은 하나님이 세운 왕이었다. 결국 베냐민 지파의 사울은 죽고, 유다
지파의 다윗은 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한 레위인으로 시작한 사건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열한 지파가 될뻔한 사건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의 중심에는 레위인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지도자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만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자기들이
원하는 성전을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심령 속의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되고, 인간이 만든 건물인 교회를 신성시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열두 제자가 열한 제자로 되는 사건이 생겼다. 바로 가롯 유다의 죽음이다.
다윗이 유다지파인데, 가롯유다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다. 결국 열두 명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들끼리 맛디아라는 사람을 그 속에 넣지만 하나님이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맛디아는 성경에서 사라지고 신약의
사울(바울)이 등장한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다. 사울은 기독교인을 학살했지만, 회심 후에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기독교 전파에 가장 핵심에 서게 된다.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앞서기니 뒷서거니
하는 모습이다. 가장 찬란한 지파가 가장 부패한 자가 되고, 가장
부패한 지파가 가장 앞서는 지파가 되는 모양이다. 오늘날도 가장 신앙이 깊다고 생각하는 자가 가장 심령
속에 부패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회개하여 부패한 마음을 살리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부패한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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