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창세기에서의 그리스도
3. 창세기에서의 그리스도
(1)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을 비교할 때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을 통해서 비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지만,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로마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을 요구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을 상징하는 가인은 죽이는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상징하는 아벨은 죽는 자인 것이다.
창세기 4장 2-5절『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율법에 따른 제사제도는 모세 이후에 시작되었지만, 역으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살펴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한다.
소제는 땅에서 거둔 모든 곡식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미를 갖는다. 피 없는 제사라고도 하고, 또 부속된 제사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소제에는 짐승을 잡지 않으며, 또 짐승의 피를 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소제는 다른 피의 제사를
드린 후에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이 소제는 피의 제사를 드림이 없이 그 효력이 없다. 소제는 제사장을 임명할 때, 성막을 짓고 봉헌할 때, 나병환자가 병을 치유하고 난 뒤에 드린 제사다.
따라서 가인은 제사장으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희생제사 없는 소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드렵혔다. 그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든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보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지키므로서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자를 상징하고 있다. 성전에서의 제사도 형식적이었고, 그들의
이권만 챙기는 사악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던 것이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첫새끼를
드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기름과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하시고, 기름은 태워서, 피는 땅에 흘려서 보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다른 생명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레위기 3장 17절에서『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위기 7장 11장 22-25절에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인간들이 먹어야 할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생명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하늘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살과 피를 드리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를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드리는 것이 된다.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제물은 이스라엘이 버린 과부, 귀신들린
자, 맹인, 죄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 가인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는 자기의 의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드리는 자의 제물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 그 생각 속에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2) 노아의 홍수 사건
노아의 홍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와 그의 일곱명의 식구들, 그리고 동물들이 들어갔다. 홍수는
죄, 죽음, 심판을 상징한다. 이사야서 57장 20절에서『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시편 32편 6절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미가서 7장 19절에서『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홍수는 하나님의 저주다. 그런데, 그 물 위에 방주가 있는 것이다. 방주(Ark)는 직육면체 상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 영어로 Ark라고 표현된 곳이 성경에는 두 곳이 더 있다. 모세의 갈대상자와
구약시대 언약궤다. 방주에는 역청을 발랐다. 방주가 사람(모세)으로 등장한다.
창세기 6장 14절「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역청과 관계되는 단어가 있는 부분을
찾아보면 창세기 19장 24절에서『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창세기의 말씀들은 불과 유황으로 표현되어 있다.
방주는 네모난 상자모형의 배다. 방주를 영어로 표현할 때, Ark라고 한다. 이Ark가 쓰여진 단어들이 모세의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궤(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이다.
방주는 고페르나무(잣나무:백향목)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 백향목은 히브리어로 고페르, 에레츠, 코페르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있고, 번역본은 잣나무, 삼나무, 백향목
등으로 표현되었다. 백향목은 성전, 언약궤에도 사용되었다.『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역청은 백향목(고페르) 나무의 진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백향목 나무의 진(고피르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역청은 몸값 속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백향목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역청은
속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칠하라』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진정시키다, 화해하다, 속죄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창세기 19장 24절에서『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여기서 유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고피르트』(백향목 나무의 진)이다. 백향목
나무의 진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으로 흘리는 피를 나타낸다. 그 피와 불이 하늘에서 비같이 내렸다는
것이다.
불은 성령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천지(물질세계)를
만드실 때 물(말씀)과 성령으로 만드셨다. 베드로후서 3장 7절에서『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늘과 땅을 불사르기 위하여는 창조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 즉 창조는 물(말씀)과
성령으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 물질세계는 하나님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시 없어진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여기에도
유황으로 번역된 단어가『고피르트』(백향목 나무의 진)이다. 불은 마찬가지로 성령을 의미한다. 못은 물이 담겨져 있는 곳으로『고피르트』가 있는 못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된 못을 말한다.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심판받아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 백향목 나무의 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는 심판받지 아니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창세기 1장의 이야기가 되며, 요한계시록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이야기가 이해되면
종말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3) 바벨탑 사건
창세기 11장 1-5절『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그들이 시날 평지에 이르고 그 곳에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목적은『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다. 이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모습이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강조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문명의 발달로 보인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제단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서『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신명기 27장 6절에서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원래 돌로 성을 쌓지만 더 견고히 하기 위해
벽돌을 만들고, 흙대신에 역청을 사용하여 돌보다 더 단단하게 재료를 개발한 것이다. 성경은
돌을 그리스도로 표현하는데, 이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만든 벽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든 벽돌로 성을
쌓은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체할 탑을 세운 것이다.
자기의 의(이름)를 세우는 것이다. 자기의 의는 도무지 부숴지지 않는 단단한 돌과 같이 굳은 것이다.
역청(헤마르)은 모세의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에서 사용된 바가 있다. 이는 구원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역청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성(피라미드)을 쌓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참 역청과 거짓 역청이 있다. 참 역청은 그리스도, 거짓 역청은 우상숭배를 상징한다. 참 역청으로 성전을 쌓으면, 새성전(그리스도)가 되지만, 거짓
역청으로 성전을 쌓으면 옛성전이 된다. 성도의 심령 속에는 참 성전(지성소)이 있으며, 거짓 신자의 심령 속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옛성전(바벨탑)이 있다. 바로
자기가 우상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11장 6-9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언어는 인간들 간의 소통하는 말이나,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언어를 흩어버려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으로 하나되어
서로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흩어지는 언어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들의 모습이다.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나 언어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원래의 모습을 찾고자 하면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언어는 곧 성령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 로고스이시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쌓고 있는 중이다. 마음 속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라는 우상이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악한 천사들이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흩어버린
것이다. 바로 세상에 흙으로 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우상이 서로
연합되어 작동하려고 계속 시도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처럼 보이는 신을 만들어 그들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 사도행전 2장 1-4절『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4) 멜기세덱
창세기
14장 18-20절에서 멜기세덱이 등장한다.「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전쟁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멜기세덱은 말라크(왕)와 짜데크(의)의 합성이다. 의의 왕이다. 의는
공의를 나타낸다. 이사야 32장 1절에서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공의가 짜데크이다.
예레미야
23장 5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짜데크)를 행할 것이며"
말라기
4장 2절에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쩨다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짜데크는 메시야를 나타낸다.
멜기세덱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상세하게
소개된다. 히브리서 7장
1-3절에서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람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다.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서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멜기세덱은 살렘왕이라고 했다, 살렘(평화의 왕)은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시편
110편 1-5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마태복음
22장 41-45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다윗이 예루살렘 왕이었는데, 다윗이 시편에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주(주의 오른쪽에 계신)라고 표현한 것이다. 주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결국 메시야는 살렘왕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7장 8-10절에서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 표현되었다.
제사장은 죄에 대해서 중재자(호 로고스)이시다. 아브람이 전쟁 후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이 전쟁은 주권이 하나님(그리스도)에게 있는 전쟁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주권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표현이다. 십일조는
전리품을 드리는 것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금과 은의 전리품으로 성전의 기물을 만든 것이다.
창세기 14장 17절에서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롯이 거주한 곳이 소돔인데, 그 대표로 소돔왕을 표현했다. 롯은 소돔왕과 연합하고, 아브람은 멜기세덱과 연합했다. 누구에게 연합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롯과 연합한 소돔은 심판되고
소돔왕과 연합한 롯은 심판으로 부터 구출된다. 아브람은 소돔왕(세상
임금 상징)이 준 전리품을 받지 않는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세상과는 연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권이 되어서 벌리는 전쟁의 이야기다.
(5)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
창세기 15장 12-17절『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해 질 때는 하루의 마지막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종말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을 종말의 시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말씀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여호와와 아브람과의 대화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성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에는 온 세상이 흑암에 갇혀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1장 1-2절의
내용이 그러하다.『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은 그리스도의 예정에 대해서
말하고, 1장 2절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는 영적 흑암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아브람의
자손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들이 애굽 땅에 들어가서 사백년 동안 바로의 종이 되어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이다. 범죄한 천사들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사탄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데, 4백년이라는
말은 영적 암흑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사람 아담까지의 기간을 숫자로
표현하면 약 4천년이라는 기간이 지나간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징벌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능을 위임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그의 사자들을 굴복시키고, 그의 지배하에 있던 회개하는 자를 해방시킨 것이다.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보물을 가지고 나왔다. 출애굽기 3장 19-22절『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구원받아 사탄으로부터 자유를 얻게되면서, 얻는 보물은 하늘의
보물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늘에 앉히심을 얻는 놀라운 은혜를 얻는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아브라함의 조상은 첫사람(그리스도)이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의미의 말씀이다. 이 땅은 가나안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천국)를 상징하며, 사대에서 사(4)는
영적 암흑을 나타낸다.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는 동안은 영적 암흑기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 때 부터는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이다. 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요한복음 1장 9-12절『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아모리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공격을 가한 민족이다. 성도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에 방해하는 것은 바로 육적 자아가 될 것이다. 신도의
마음에 육적 자아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회개할 기회를 앓게 될 것이다. 육적 자아가 완전히 지배하기 전의 영적 상태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라는 말이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영적
암흑 속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의 빛 그리스도가 나타나 부활생명으로 일어나, 모든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줄 것이라는 예언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횃불은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쪼갠 고기들은 육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육적으로 죽은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생명을 받으면, 영생의 몸으로
다시 일어난다는 언약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6) 롯과 소돔과 고모라
창세기 19장
1-3절『저녁 때에
그 두 천사(말라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아도나이)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저녁 때라는 말은 영적 암흑의 상태를 의미한다. 심판이 이르렀다는 것이다.
말라크는 하나님의 사자, 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아도나이(기본형은 아돈)는
주님이라고 번역된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복수형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단수 취급한다. 주님은
한분이지 복수가 아니다. 다른 예를 들어서 엘로힘(하나님)도 복수형의 단어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복수가 아니라 한분의 하나님이시다.
아도나이를 영어 성경은 lords로 번역했으며, 한글
개역개정은 주님이라고 단수로 번역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미루어 보건데, 영어 번역은 두 천사에
비추어 아도나이를 lords로 번역했고, 또 그들이라고 표현하면서
문법적으로 복수의 형태로 맞추고 있다.
시편 110편 1절 『여호와(야훼)께서 내 주(라도니:기본형은 아돈)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주(아도나이)는 헬라어로 큐리어스이다. 그런데,
영어 성경은 여호와를 The LORD로 번역했다.
마가복음 12장 36절『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큐리어스)께서 내 주(큐리오)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서라 하셨도다 하셨느니라』영어성경은 주님에
대해서, 여호와에 해당되는 주와 내 주라고 한 주를 모두 소문자 The
Lord로 번역했다.
창세기 4장 26절에서『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여호와의 히브리어는 야훼이다. 여기도 영어 번역(niv, kjv)에서 여호와를 대문자 The LORD로 번역했다. 영어 성경에서 여호와를 대문자 The LORD, 그리스도를 나타낼
때는 소문자 The Lord로 표기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영어 번역이나 개역개정 번역 모두가 불완전한 번역이라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도나이와 야훼의 관계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필사할 때, 아도나이라고 불렀지만, 표기할 때는 공란으로 두었다. 그런데, 칠십인경을 만들 때,
YHWH라는 신성 사문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리를
중심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 표기를 아도나이 대신에 아도나이의 모음 a와 ai를 YHWH에 붙여 YHaWHai로
만들어 야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야훼보다 아도나이가 먼저 성경에 등장했다는 말씀이다.
두 천사(말라크)와 주님(아도나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두
천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모양이다.
창세기 18장
1-2절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18장 2절에서는 사람 셋으로 표현한다.『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장 9-10절에서는『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그들과 그 라는 관계가 애매하다. 그들은 세사람(여호와와 두 천사)을 의미하지만, 그는
여호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99세된 아브라함에게 내년(100세)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고,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18장 20-22절『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결국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대화를 지속하고, 두 사람(천사들)은 소돔으로 행하여 간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심판을 멈출 수
없는가를 물었으며, 의인 10명이 있으면 심판을 멈추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의인 10명이 없다는 것이다.
소돔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두명의 천사인 것은 분명해졌다. 두 천사는 누구이며 아도나이는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만난 야훼, 그리고 롯이 만난 아도나이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롯은 어떻게 그들이 그리스도이며, 천사들인가를 알게되었는가? 성문 앞에서 그들을 보자 말자 단번에 알게 되었던 것처럼 묘사하지만,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을 다니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으며, 귀신들린 자들, 문둥병자들, 앉은뱅이를 치료해 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것을 깨닫는 자도 있었겠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롯은 의로운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통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소돔에 있는 수많은 자들은 오히려 신성모독죄로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발을
씻는 의미는 물세례 즉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잠을 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 갈 길을 가는 것은 성령의 불세례로 가시는 것이다.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어두운 밤의 고초를 겪을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해서 새언약을 하신 것이다. 떡을 떼고 잔을 붓는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심판과 부활을 약속하신 것이다.『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창세기 19장
4-5절『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의 집을 에워싼 사람들은 롯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와 천사들을 자기들의 우상을 짓밟는 사람들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소돔 사람들이 성문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빠져들었기 때문이리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백성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으셨다.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갖 기적을 보여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었는데, 왜 백성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힘으로 지배하는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9장
6-7절『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악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소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못하고,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9장
8절『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딸은 영적으로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성적인 문제로
여겨질 것이나, 이는 남녀간의 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소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내용이다. 소돔 사람들이 의로운 롯의 딸을 대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돌이켜, 그리스도를 못박지 말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창세기 19장 9절『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법관은 지도자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
창세기 19장 10-11절『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여기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천사들이다. 의로운 자와 심판당해야 할 자를 구분한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희생양의 피를 칠한 집과 그렇지 못한 집을 구분하여 심판을 내리시는 모습이다.
창세기 19장 12-13절『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이 이야기는
출애굽 당시의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되어 지배를 당하고 고역을 했다. 마찬가지로 롯의 가족도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이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자들도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신 것처럼 롯의 아내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는 열가지 재앙의 심판을 받고, 장자의 죽음으로 백성들을 내 보내주었는데, 롯과 가족은 천사들의 강권으로 소돔으로부터 나오게 하고, 불심판으로
멸망시킨 것이다.
출애굽 당시
희생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표가 되었으며, 소돔의 불심판에서 천사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그 말씀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표가 되었다. 믿음은 곧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자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7) 이삭과 모리야 산
창세기 22장 1-2절『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했다. 이 시험은 어떤 것인가? 브엘세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물은 약속을 상징하고 약속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 25절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애굽기 16장 4절은 왜 시험을 하는지 알려주신다.『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신명기 8장 16절에서『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시험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시는 것이다.
브엘세바의 의미가 무엇인지, 언약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시험하신 것이다.
이삭은 독자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독자(야히드)인가? 야히드는 야하드(하나)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하나에서 나온『연합하다』 라는 것이라는
의미다.
아담에게서 하나님이 다른 한편을 끄집어내었다. 본래 하나였는데, 다른 하나를 끄집어 낸 것이다. 하나님이 원래 하나인데, 독생하신 그리스도를 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로서 이삭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에 대한 독생자의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연합하여야 하는 것을 말해준다.
모리야 땅의 모리야는 라아(본다)와 야(여호와 라는 의미)의 합성 단어다. 모리야(히브리어:라아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이라는 의미다. 모리야는 여호와의 계시라는 의미가 된다. 여호와의 뜻을 알려주는 산이 모리야 산인 것이다. 모리야 산에 성전이 세워진다. 모리야 산은 진정한 예배와 관련이
있다. 표적을 통해서 실체를 알려주신다. 표적에만 몰두하면
썩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를 통해서 언약을 맺었을 때, 백세때 아이를 얻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육적으로 죽은 것 같이 되어 아이를 얻었으므로 육적으로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산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정해준 그곳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 시대는 모리야 산인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이 모리야 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곳, 말하자면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3-4절『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와야스켐 וַיַּשְׁכֵּ֨ם :기본형은 샤캄)』샤캄은 어깨라는 의미로서, 어깨에 천막을 메고 옮기는 모습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제단을 세우는 일이었다.
샤캄(세겜)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에서 수가성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수가가 세겜과 연계되는 단어가 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예배에 대한 것을 암시한다.
굽이 하나인 나귀는 굽이 둘인 소와 달리 부정한 짐승인 것이다. 부정한 짐승은 이방인을 상징한다. 두 종은(나아르:아이)은 율법과 모세를 의미한다. 아이는 젖이나 먹는 자들, 장성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유다. 율법은 아이, 복음(의의 말씀)은 장성한 자를 묘사한다.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번제는 올리다 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아라』에서
유래된 단어다.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지성소와 성막 사이의 휘장이 갈라진 것이다. 나무가 쪼개진 것(바카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떠난 죄의 벽이 사라지는
것이다.
『제삼일에』삼(3)은 아버지와 아들과 탕자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삼십은 아버지와 아들과 탕자가 하나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은 삼십에 공생애를 시작하여 삼년간 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래서 이 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함께 죽고 부활하는 그런 의미를 갖는다.
삼일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삼년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장에서
사흘되는 날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또 성전을 헐라 삼일만에 세우리라 리고 말씀하셨다, 삼은 구원과 관련이 있다. 애굽,
광야, 가나안으로 연결된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시간과 장소가 멀리 있음을 의미한다. 즉 먼 미래에 있을 일을 아브라함에게 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들어가셔서 마음의 눈으로 보게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5절『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이(나아르)는 그리스도(이삭)가 율법 아래에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산에서 번제를 드리고 아이와 함께 내려오겠다는 것이다. 번제를 드리면 아이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내려오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번제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신 후에, 다시 재림하여 올 것이라는 의미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나귀)과
너희(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6-7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불과 칼에서 불은 성령의 불,
칼은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에서 죽고, 성령의
불로 세례를 받아서 부활한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불과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칼은 동물을 도살하기 위한 칼이다. 이삭이 이르되『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 말은 율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번제물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로 작정했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이다.
창세기 22장 8-9절『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아브라함이 뒤에 등장할 숫양을 깨닫고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실제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말은 대신에 하나님이 준비할 것이라고 아들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부활의 기대를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율법으로는 생명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이삭으로서 번제 제물로서는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 내용을 알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서 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면서, 하나님이 스스로 매달리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은 여기에 대신할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만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 이삭이 묻는 질문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말하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해야만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직 율법 속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참된 어린양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이다. 이삭은 자기가 스스로 그 어린양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다른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나아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 가서 단을 세우고, 나무를 벌려놓은 것은 율법을 헤쳐놓고 라는
의미다. 율법 위에 그리스도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장작: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 의해서 그리스도(이삭)가
죽는 것이다. 율법 아래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율법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율법에 의해서 죽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부활하는 것이다.
이삭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은 율법에 의한 제사로서 많은 양들이 제사로 희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제물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 것을 명령하는 내용이다. 그 때는 율법이 끝날 때까지다. 선지자 요한이 온 때까지인 것이다. 세례요한이 끝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등장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가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마음을
알려주신다. 반드시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을 통해서
반드시 율법 아래 죽어야 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10-11절『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나타나셔서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 것을 명령했다. 아이는 율법을 짊어진 아이가 된다. 즉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할 아이인 것이다. 이삭 대신 숫양이 죽게되어 있다. 모리야 산에서 드려지는 번제의식은 율법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 죽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이것은 율법시대에서 나타나게 되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를 죽이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계속 율법적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서 율법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12절『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표면적으로는 그 믿음의 결과를 행동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도 믿음의 결과를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행동의 결과는 무엇인가 선을 행하여, 거룩한 행실을
통하여 라는 그런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그런 믿음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자기의 정체성이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과거의 옛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새사람으로 이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새사람에게 집중하라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13절『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숫양(자카르)에서, 자카르의 어근이 되는 단어의 의미는『기억나다 생각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숫양을 준비하신 것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 되는 것이다.『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대신은 『타하트』인데, ~아래에, 또는 ~대신에 라는 뜻을 갖는다. 대신에 라는 말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을 대신해서 숫양을 번제로 드렸다는
말은 아들인 이삭과 숫양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숫양을 선물로 주셨다. 그 선물로 주신 양으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선물의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나의
헌신 등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드리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14절『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이레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레(יִרְאֶ֑ה)는 기본형이 라아(רְאֶ֑ה)이다. 라아에 요드가 붙어서 미완료형으로 이레로 부르는 것이다.
라아는 보다 나타나다 라는 의미다. 여호와의 이레는『그(양: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산에 나타나리라』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숫양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8) 야곱과 벧엘
창세기 28장 10-19절『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브엘세바는 자기의 일을 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하란은
밧단아람으로 밧단아람나라하임의 줄임말로서 하란 또는 갈대아 우르와 같은 장소를 나타낸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세상에 온 자들을 상징하는 곳이며, 자기 일을 하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한 곳에 이르러는』한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창세기 1장 9절에서『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여기의 한 곳과 같은 단어다. 하나님이 한 곳을 말하시는 의도는 뭍이
드러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뭍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야곱이 그곳에서
돌베개를 하고 자다가 꿈을 깨고 돌을 가져다가 벧엘(성전)이라고
하였다. 물이 한 곳에 모이고, 뭍이 드러난 곳도 한 곳이다. 뭍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나타낸 곳이다.
뭍은 성전이
세워질 곳인데, 사람들이 왔다가 가는 것이다. 뭍의 흙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 속에 범죄한 영을 넣고, 다시
그 영이 나가는 것이다. 일종의 감옥과 같은 곳이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최초의 인간은 첫사람이다. 첫사람 아담은 모든 범죄한 영들에게 육의 몸을 주기 위해 생명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영들을 살리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전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전에서
죄인들이 들어오고, 희생의 제물이 죽고, 다시 죄인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룬) 그 곳의 한 돌(에벤)을 가져다가 베개(메라아샤:머리 두는 곳)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샤카브).
해가 지면 밤이
온다. 어두움은 곧 사망이라는 의미다. 인간에게 사망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야곱의 꿈과 같은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유숙한다는 것은
사망의 이 세상을 지내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빛(구원)을 만날 수 있기도 하고 만날 수 없을 수도 있다. 만나는 사람은
야곱이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에서다. 돌은 율법이 쓰여있는
돌(반석:그리스도)을
의미한다. 율법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어둠에 있는 세상에서 성전(그림자)이
오시며, 빛이 실제 오실 때 그분이 참성전이 되는 것이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술라미:땅에 연결되어 버티는 것)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야곱이 꿈을 꾼 사닥다리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첫사람 아담과 함께 범죄한 영이 내려오고, 마지막 아담과 함께 구원받은 영이 올라간다는
의미다. 야곱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야곱이 꿈에 본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을 말씀해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나다니엘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닥다리 외에는 없음을 알려준다. 사닥다리(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땅은 분리된
말씀으로 영들이 세상에 와서 사는 그 땅(뭍)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의 땅은 성전(그림자:솔로몬
성전)을 의미한다. 그림자 성전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안되는 것이다.
하늘의 사닥다리가
되는 참성전이 아니면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다. 땅을 자손에게 준다는 것은 참성전(그리스도)을 자손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 자손들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들이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아파르)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티끌(아파르:땅의 흙먼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흙먼지에 물이
들어가서 인간의 형체(아다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다마가 아담이 되는 것이다. 땅의 티끌같이 많아지는 것은
아담 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들이 범죄하기 전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이 하늘의 사닥다리 즉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샤마르) 너를
이끌어 이 땅(아다마)으로 돌아오게 할지라』하나님이 말씀으로
항상 야곱(그리스도)과 함께 있으며, 항상 보호하시며, 인간(아담)이 되기 전의 아다마 상태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들이 육체에
들어갔지만, 영과 육이 분리되어 이곳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이 땅(아다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곳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잠이 깨었다는
것은 권능의 말씀으로 어둠의 권세를 깨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범죄하여 육을 입고, 이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다시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니 너무 충격적인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참성전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원래 있었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하늘의 문이라는 것을 성도가 깨닫게 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사실에 두려워지는 것이다.
(9)
요셉과 애굽
요셉은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꿈을 통해서 많은 계시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서 형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창세기 37장
1-7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채색옷에서 채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는 없으며, 헬라어로 번역(70인경)될 때 헬라어 파스(손, 발바닥)다. 그런데,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파스가 포이킬론(여러가지 색)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발바닥까지 덮는 긴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긴옷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을 연상하며, 귀족들이 입는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상징한다.
요셉은 계속
꿈 이야기를 통해서 형들의 질투가 최고조에 달한다. 창세기 37장
8-9절『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렇게 해서, 형들은 요셉을 애굽의 상인들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거짓 진술을 한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하인으로 있게 되는데, 그의 부인의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감옥에서
다시 꿈을 통해서 떡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장래의 일을 알아맞추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된다.
애굽의 바로가 꿈을 꾸는데,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창세기 41장 1-13절)『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바로가 술맡은 관원장의 말을 들어보고, 요셉을 불러 꿈을
해석하게 했으며,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대로 칠년 풍년이 오고,
칠년 흉년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풍년의 시기에 식량을 흉년에 잘
대비해야 한다고 말을 하므로, 바로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그를 총리로 내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요셉이 총리가 되고 근동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식량을 얻기 위해 애굽으로 몰려 들어, 애굽은 가장 강력한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때 가나안에 있던 야곱과 그의 형들도 요셉으로 인해 애굽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애굽(세겜땅)에서
살았던 야곱의 열두 지파 백성들은 거의 남자 장정만 육십만에 이르게 되고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이백만 정도되는 거대한 민족으로 확장되었는데, 이민족이 애굽을 공격하여 지배하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역에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영적으로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바로는 사탄을 상징한다. 요셉은 그의 신하가 되고 물질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된 것이다. 결국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가나부터 애굽으로 들어오게 한 자가 되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한 자라는 말씀이다.
요셉은 첫사람(그리스도)의
모습이고, 모세는 마지막 사람(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첫사람은 죄의 몸인 육의 몸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준
그리스도였으며, 마지막 사람은 죄의 몸에 대해서 죽고, 의의
몸인 영의 몸으로 부활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부활생명을 준 분이시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체 속에 갇혀 인간들이 되었는데, 첫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온 것이다. 이는 요셉을 통하여 가나안의
형제들과 식솔들이 애굽으로 들어온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요셉은 물질적 풍요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영적으로는 기갈이 되는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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